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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이 꽃 지면 그대 祭日이 오는 구료 - 한희원

by 소금눈물 2015. 7. 1.

지금까지 저를 따라 그림을 함께 보아주셨습니다.

이왕 미술의 숲에 들어오신 김에 오늘은 좀 어려운 말을 배워볼까요?

 

미학에서 쓰이는 말 중에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사진의 본질(혹은 의미)에서 지적한 말인데요. 하나의 사진 속에는 두 개의 본질이 겹쳐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의 틀에 따라 읽는  것, 그렇게 이해되는 의미가 스투디움입니다. 특정한 사진을 보았을 때 관람자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보편적 의미란 뜻이지요. 이에 반해 푼크툼은 그런 일반적인 해석과 상관없이, 혹은 그런 의미를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을 찌르는 개별적인 효과를 푼크툼이라 부릅니다.

 

문학의 예로 들자면 박범신선생이 말했던,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할 때, 누구나 아는, 세상에 떠다니는 보통의 개념이 '스투디움'이라면, 나의 것, 그리하여 세상에는 나만이 가진 그 특별한 것, 그것이 '푼크툼'인 것이지요.  어린왕자의 별에서 철없고 뽐내기 좋아했던 그 작은 장미 한 송이가 세상에서 다시 없는 어린왕자의 특별한 푼크툼이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어느 별을 떠돌던지 반드시 그 별로 가야만 했던, 그 상처의 사랑이었던 것처럼요.

 

제가 좋아하는 현대작가들  몇몇 중에서 특별히 5월이 되면 생각하는, 각별히 사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한희원작가의 이 그림입니다.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 누구나 보더라도 이 그림을 보면 먹먹하고 따뜻하고 또 쓸쓸한 감정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구도는 단순하기 짝이 없지요.

손등의 핏줄이 울퉁불퉁 다 드러나도록 여윈 노파가, 언덕인듯, 산 등성인 듯 분명치 않은 곳에 앉아 먼 선 너머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왼쪽에 비스듬히 앉은 노인은 아마도 발치 아래 펼쳐진 산들과 시각적으로는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압도합니다. 마치 온 산들 전체와 마주 앉은 것처럼, 다가오는 그 산들 모두와 마주 서서 대항했던 젊은 날의 시간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붉은 황토빛으로 겹쳐진 산그리메 너머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혹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흰 블라우스와 무릎 위로 올라간 치맛자락 아래 흰 양말, 대나무를 잘라 만든 지팡이. 특별해보이지 않는 어느 누구의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비녀로 쪽을 찐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네요.

시골 오일장에서 나물 바구니를 앞에 두고 앉아있던 노인 같기도 하고, 허리를 굽히고 산모롱이를 휘적휘적 돌아가던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돌아앉아있는 노인의 어깨에,  결코 쉽지 않았을 각다분한 그녀의 삶이 짐작이 됩니다. 그녀와 맞서고 그녀를 고립시켰던 그 산들은 이제 날카로움을 버렸습니다. 그녀와 더불어 늙어가며 닳아진 산의 윤곽선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녀의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 산 골짜기 골짜기마다 살아온 시간들, 그 지평들이 잠겨있겠지요.

 

관람자들은 여윈 노파의 등을 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내가 잊었던 그 어머니, 슬프고 다정하고 그리운 그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염없이 나를 그리워하셨을 그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울컥해지겠지요. 설령 저 노인이 내 어머니가 아니고, 그녀가 기다리는 것이 아들인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祭日이라는 제목이 주는 무거움 속에서 정화(catharsis)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아마도 스투디움이겠지요.

 

여기서부터는 사족입니다.

이 그림의 본디 의미와는 상관없는, 저의 푼크툼이니 그냥 여기서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구름은 하늘 끝 멀고 멀고

세월은 이렇게 가고 가고

주인 없는 꿈속에 시름만 깊고 깊어

 

아들아.

초파일 등을 달다 산 너머를 바라본다.

도적같은 세월은 사 반세기를 흘러

분통같은 에미 이마에 고랑을 내었다

고랑이 흘러 가슴에 닿아 지리산 골짝을 만든다.

 

어떠하냐.

삼 년 전에 가신 너이 아부지 알아는 보겠더냐

불효한 자식이라 호통은 안 치더냐

말라붙은 피딱지는 떼고 나올 것이지

에미 꿈속에 흰 저고리가 찢어져 늘어지고

나넌 바늘도 없이 허둥대다 깨었다.

 

아가... 내 새끼야.

임서방네 밭 그늘에 너를 몰래 묻고

내색도 못 허구 보리가 익었다.

보리가 익어 흔들릴 때마다

에미는 몸서리가 나. 차마 밭고랑을 딛지 못하고.

 

 

걱정얼 말어라.

에미 갈 날이 가차우니

에미는 암시랑토 않다.

암시랑토 않다.

밥도 묵고 잠도 잔다.

너도 없는 겨울밤이 무섭고 떨리지도 않는다.

솜털같은 내 새끼

박속같은 내 새끼

맨발로 달려올 중 에미는 안다. 안다.

 

이 꽃 지면 늬 제일(祭日)이 오는구나.

내 새끼 한 해를 걸어 에미헌티 오는구나.

늙지도 못한 내 새끼가, 죽지도 못한 에미한테 이제 오는구나.

 

<오월 어머니>

 

 

 

이 그림을 보고 오래 전에 써 두었던 시입니다.

이 그림은  제 푼크툼의 오월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푼크툼, 그렇게 기억하는 그림은 무엇이 있나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클림트의 <키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그림들 속에서, 당신의 추억으로, 당신이 특별히 가슴에 간직하고 기억하는 푼크툼은 어떤 그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