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되었습니다.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으나 지금 꼭 보아야 하는 책은 펴보지도 못하고 시간을 자꾸 흘려보내니 썩 잘 하는 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다 또 조만간 기약없이 휴재하게 될 것도 같구요.
오늘은 혜원 신윤복의 술집에 구경왔습니다. 우리 미술사상 어쩌면 가장 사랑스럽고 친근하고 아름다운 명작들을 많이 남긴 혜원. 혜원의 그림에는 해학과 더불어 우리 민중에 대한 그의 다정함과 사랑이 느껴져서 볼 때마다 미소를 짓게 됩니다. 남과 같이 보기에 좀 민망한 춘화라 할 지라도 혜원의 그림에는 여러가지 함축된 의미와 은근한 익살이 있습니다. 동시대에 태어나 자주 비교되는 단원과는 또 다른 멋과 아름다움이 있지요. 특히나 아름답고 선연한 색채를 자유자재로 풀어놓으면서 그의 그림에는 다른 화가들과 다른 경지의 명랑하고 산뜻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화면 전체를 화려하게 풀어놓는 것은 아니지만 딱 그 자리에, 기가막히게 입힌 색감은 경탄이 절로 나옵니다.위 그림에서도 주모의 진청색 치마색이 아니었더라면, 노란 초립을 쓴 별감의 붉은 두루마기가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심심하고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관람자의 시선을 확 사로잡으면서 단번에 이 그림은 생명을 얻습니다. 거기에다 그림 하단부의 진달래의 연분홍 꽃 색에 시선이 머무를 즈음에는 꽃핀 봄날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흥에 겨운 사내들의 실없는 자랑과 주모 앞에서 서로 뽐내는 모습이 관람자들을 유쾌하게 합니다. 단조롭고 담담한 집안의 가구들, 기물들 사이에서 대비되는 아름다운 색감이 활기를 줍니다.
조선500년 역사는 사실 거의 국법으로 금주를 명하였습니다. 알코올은 주로 곡물과 과일에서 얻는데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곡물이었지요. 20세기에 이르러 고구마가 주정이 되기 이전까지, 사실 술은 대부분 쌀과 보리를 이용해서 빚거나 증류해서 얻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농업생산에 목을 매고 있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은 무엇보다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경우 곡물의 낭비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지경에 그 귀중한 곡물을 술을 빚는다는 것은 큰 일이었지요. 정책의 시행자나 군주에 따라 금주령이 좀 완화되는 정도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금주령은 조선의 기본 정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다고 술에 대한 사람의 탐욕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요. 아마도 인류가 모여살기 시작하고 공동체생활을 시작하면서 거의 동시에 술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공동체의 축제에, 개인의 잔치와 풍류생활에 술은 반드시 함께 하는 못된 친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금주령이 국법으로 정해져 있다하나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식기록인 <종묘조서연관사연도>에서는 경복궁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고 부축되어나가는 대신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고, 수많은 기로연 그림들에도 술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선비가 모여 풍류를 논하는 자리에 어찌 술이 없었을까요. 뭐 사대부나 대신들 모임 뿐 아니지요.
위 그림은 도성의 어느 선술집 풍경입니다. 말 그대로 서서 술을 마시는 술집이지요. 드라마에서 보면 조선시대 주막이라면 개다리소반에 백자술병이 얹혀있었는데 모든 주막이 그런 건 아니었나봅니다. 저 술집을 보면 주모는 길다란 국자로 빈잔에 술을 담고 있습니다. 잔술을 팔기도, 사기도 했나봅니다. 꽃이 핀 환한 봄날 대낮에 관청에 있어야 할 의금부 나장, 별감들이 모여 거나하게 마시고 있습니다. 얼굴표정 좀 보세요. 얼굴이 불콰하게 벌써 한참을 들이킨 모양입니다. 뒤돌아 서 있는 양반은 옷자락이 흐트러진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직급으로 보자면 의금부 별감이나 나장이나 대단한 직위는 아니지요. 대전이나 왕비전,동궁전의 명을 출납했던 별감은 양반은 아니지만 왕실 최고위 신분의 지근거리에서 모신다는 이유로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왕명출납을 별감들이 거의 다 도맡아 했기 때문에 대신들도 이들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임금의 친인척을 두들겨 패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답니다.별감들의 복색은 노란 초립과 홍의를 입고 있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벼슬의 위치에 따라 패용이 엄격하게 금지된 상투의 관자도, 별감들은 별갑을 써서 달만큼 호사스러웠고 이들이 도성을 휩쓸며 저지르는 왈자짓에 원성도 꽤 높았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국법을 어긴 사대부 중죄인만 감당했던 의금부의 나장 역시 그 역할 때문에 이렇게 위세를 부렸던 것이지요. 국법을 휴지쪽처럼 무시하며 대낮에 나라가 정한 금주령을 어기고 거나하게 취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이러다보니, 비록 술은 팔고 있지만 술을 담는 주모나 주막살림을 돕는 중노미나 표정이 고울 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거나하게 마시고 나가면 한길거리에서 옷자락을 찢고 갓을 망가뜨리며 싸우는 <유곽쟁웅>으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이정명의 아름답고 뛰어난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정조는 이 그림에서 붉은 진달래꽃을 보고 단박에 혜원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립니다. 별감들이 양반의 위세를 업고 대낮에 술을 먹고 민가를 휩쓸며 괴롭히는 것을 눈치채고로 바로 정국을 주도하고 못된 무리들을 혁파해버립니다. 현명하고 힘있는 군주와 자신의 예술로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던 예술가의 만남이었지요.
혜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고, 정조의 아쉬움을 얘기하자면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 이만 줄입니다. 자타공히 정조빠인 제가 여기서는 더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술 이야기는 이렇게 마칩니다. 다음 그림은 어떤 주제로 할까요?
'그룹명 > 소금눈물의 그림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황행촉도 (0) | 2015.06.12 |
---|---|
2015.05. 24 대전 시립미술관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0) | 2015.05.25 |
<술 마시는 여자> 로뜨렉 (0) | 2015.04.28 |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0) | 2015.04.28 |
<병색의 디오니소스>- 카라밧지오 (0) | 2015.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