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룹명/낡은 서고

되다 만 어느 화가의 겨울 이야기 - <화가전>

by 소금눈물 2014. 5. 23.

정명아.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의 이야기가 그림처럼 펼쳐져보이기도 하고,  또 반대로 그림을 보다 보면 드라마틱한 소설의 한 장면처럼 보여질 때가 있지.

며칠 동안 잡고 있던 이 길지 않은 단편이  그랬다.

참 이상했어. 분명히 '좋은 소설'일텐데 나는 재미가 없었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생생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들을 태우고 날아가는 기차의 모습도  환상적이고 신기한데 왜 재미가 없었을까. 독창적이고 위트 있는 문장도 좋고, 정적인 화면이 동적으로 확장되어가는 신기한 경험도 좋았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내가 본 그림 중에서 어떤 그림과 닮았을까 생각했어.

어디서 분명히 본 듯한 그림. 소설의 문장 너머로 떠오르는 닮은 이야기.

 

 

 

마크 샤갈(Marc Chagall. 1887년 7월 7일-1985년 3월 28일) <대행렬>

 

샤갈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샤갈의 그림들은 언제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

그림 속의 배경들은 2차 대전의 참화 속에서 게토로 소개(疏開)되는 유대인들의 행렬이기도 하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죽음의 길이기도 하지만, 화려하고 신비로운 화폭 위에서 양들과 꽃을 든 신부와 하늘을 떠다니는 아름다운 음악가들의 모습들을 보여주지.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는 그랬어.

정식으로 화가수업을 받지 못했고, '세필 붓'과 '온전한 참나무 조색판'을 가질 수 있는 기회로 군 입대를 들뜨며 기다렸던, '지금은 되다 만 화가'인 가난한 친구. 한때 '그 누구보다 더, 달 보다도 더 눈부신 활기가 깃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짐승만도 못'한, 짐승도 못 된 나. 이들이 진눈깨비 휘몰아치는 도시의 밤, '별가루가 술집의 환풍구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남루한 선술집에 주저앉아 되다만 묘비에 되다 만 문장 하나쯤 남기는 것으로 겨우 위로하며 견디는 차가운 겨울밤의 모습들, '나'와 친구 말이야.

 

물감을 빼곡히 바른 캔버스의 이면, 보이지 않는 그 그림의 밑바탕에는 손가락 두 개를 자주포 궤도 아래 묻고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는 차가운 겨울에 서 있는 화가가 있어. 아내와 딸에게서 버림 받은 내가 있어. 평생 익힌 재주로 연탄 구멍 같은 것은 기가막히게 잘 맞추지만 다른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노파가 있어. 하늘에서 떨어져 길 바닥에 머리를 쪼개고 짜증을 내는 소녀가 있어. 버림받고 쫓겨난 노파가 있어. 그리고 또 그들, 그들... 분진을 뒤집어쓴 인부들, 마음에 없는 것들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달하는 이들. 그런 이들. 

하늘을 붕붕 나는 기차에는 이런 이들이 샤갈의 그림 속 처럼, 트럼펫을 불며, 플룻을 불고 북을 치며, 점점 짐승이 되어가서 종국에는  정말 짐승 같아진 나와 함께 깔깔거리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거야.

 

아니야. 샤갈이 아니었어.

영감을 읽은 버림받은 예술가와 방향치 모험가와 뒷골목 사창가 진열장 아가씨와  변기 속 천애고아 신생아들 - 버림받고 찢겨지고 쓸모없고 보잘것 없이, 어쩌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괴기스러운 이들이 겉으로나마 아름다운 그 샤갈의 주인공들은 될 수 없었어.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909년 10월 28일 - 1992년 4월 28일

 

 

프랜시스 베이컨이었어 이 그림은.

하늘을 날아가는 신비롭고 즐거운 기차여행.

그 열차 안의 승객들은  난자되고  해체된 육신, 비명을 지르며 눈이 없는 입을 내밀고 우는 얼굴들이었어.

이 그림은 그래서 시각적으로 우리를 현혹하고 위로하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안 보이는 눈으로 더듬고 비명을 지르는 촉각적인 그림이 되는 거야. 블랙코미디같은 문장으로 킬킬거리고 웃다가도 그 웃음의 끝이 서늘해지는, 웃을 수 없는 서글프고 괴로운 한숨들.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아본 화가가 남들의 눈에 들지 못하는, 끊임없이 모독당하고 버려지는 그림 속에서 절망하듯이, 재현의 파괴와 트릭으로 작품을 뒤틀고 스스로를 모독하고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얼굴과 신성을 해체해 버렸던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로부터 영감 받은 트립티크>

 

동물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 푸줏간에 걸려있는 무정형의 살덩어리로 그는 자신을 그렸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신성하고 전형적인 형태로 바쳐지는 삼단제단화의 형식을 차용해서,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라는 걸 보여 주었어. 

이른바 '인간 중심'의 파괴, 인간 형태의 파괴, 얼굴을 지우고 원초적인 신체감각기관을 비틀어 야유하는 살덩어리들. 그 살덩어리들의 비명.

 

도시에서 발을 딛지 못하는 그들이 날아가는 하늘은 어디일까. 그들을 태운 기차는 무엇일까. 되다 만 인생들, 될 수 없는 인생들, 이루지 못한 세상 모든 꿈들이 명멸하다 묻히는 우주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이 소설 제목이 복수의 사람들- 기차의 승객들이 아니라 어째서 <화가전>, 친구의 이야기였을까를 생각해봤어.

맨 처음에 말했던 대로, 이 소설은 그림,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의 초상화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 기차의 승객들은 그가 그렸으나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불살라 사라진 잿속의 얼굴들, 그 그림들 아니었을까. 되지 못한 화가는 되지 못한 그림을 이렇게 자신을 연료로 해서 그 꿈을 띄워보낸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그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 소진해버린 것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짐승만도 못했던, 그런데 짐승이 되고 만, '되도 않'던 나는 지금 무엇이지? 무엇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내 것은 아니나, 누군가의 꿈을 배달해주고 있는 늑대, 짐승이 되어버렸군. 아 드디어 그 무엇인가가 되긴 되어버린 거군 결국.

 

 

이 소설이 내게 재미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불편한 그림이니까. 잘라진 내 손가락 두개와, 늘어진 꼬리, 털이 숭숭 덮은 이제는 없는 보드라운 내 피부를 조롱하는 그림이니까.

나도 역시 되다만 인간인 것이지.

꿈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 기차를 잡아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모자라고 어설픈, 그래서 서글픈 군상들 속에 내 얼굴을 묻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 유머러스한 문장에서도 편히 웃을 수 없었던 거야.

 

 

아주아주 먼 곳,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먼 곳으로 가는 꿈을 너는 본 적이 있니?

흰 종이 바깥으로  뻗어가는 문장의 꿈들, 바깥으로 확장되고 흔들리는 한숨의 여정들 말이야. 불편하게 하고 뒤척이게 하고 누군가를 난도질하고 찌르고 화 내게 만드는 문장들.

자글자글 타오르는 고기를 입 안에 쏟아붓고 누군가가 붕붕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차를 띄운다면, 이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서 목을 늘이며 헤매던 몸을 그만 포기하고 그런 문장들 속으로 따라가고 싶을 지 몰라. 어쩌면 내가 꿈꾸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는지도 몰라.

 

아마도 내 묘비에도  '역시 되다 말게 살다 간다'하고 새겨질지 모르지만.

아! 나는 묘비도 없겠구나 그러고보니.

 

이 모진 시간들 속에서 짐승이 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용한 일이냐고 너는 토닥여줄지도 모르지만 말야.

가끔 나는 뒷머리가 서늘해지곤 해. 내 머리통이 두 조각이 난 것처럼.

 

그런데, 우리 살아 있는 거니?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우리의 발 밑으로 까마득히 보이는 저 검은 지붕들, 허물어지는 담벼락들에는 뭐라고 써 있는 거니?

정명아 이 쪽으로 좀 돌아봐. 네 머리 뒤로 불쑥 솟은 게 설마 귀는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