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의 소설을 읽다가 이 현란한 메타포에 갇혀버려 길을 잃었다. 이 길은 시작된 곳도 없고 나오는 곳도 없다. 이야기로서의 문장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넘치는 이미지와 메타포의 소설들을 끝까지 앉은 자리에서 읽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독법은 불편하고 버겁다. 있지 않는 이야기, 있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찾아서 단어 사이를 헤매며 찾는 일, 이런 소설, 문득 어디서 본 것 같다. 이 기시감. 이인성의 소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1955년 발행이니 20년 전 소설이다. 우리 시 52편의 싯구절에서 열쇳말을 두고 진행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처음 볼 때도 그랬다. 넘치는 이미지, 앞서 등장한 시의 이미지 안에 머리는 갇혀 있는데 어쩌면 그 시어들, 그 이미지와도 상관없이 날아가고 튀는 말들, 마구잡이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쉼표, 겹쉼표 들 때문에 정말 어질어질 했다. 그런데도 읽고 나니 이상하다. 나는 이 소설에 사로잡혀 버렸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그 소설의 구절들에 사로잡혀서 한참을 보냈다.
그 기시감을 의식하며 읽게 되는 <달로>. 그런데. 읽다보니 다르다. 이인성의 그것과 한유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유주의 문장은 낯설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게 소설인가 장시(張詩)인가 어리둥절했다. 아니 시로 읽으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나열된 말줄임표들을 보면 느닷없고 말줄임표 사이로 사라진, 혹은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 없는 단어를 보면 정말 이걸 어쩌라는 건지 한숨이 나온다. 논리적이 않다. 우리가 아는 소설의 문장이 아니다. 불편한 것은 ‘소설적이지 않은’ 문장 뿐 아니다. 11쪽 중간- 먼지 신문 의자 화분 가로수 젓가락 동전의 뒷면------ 이 대목에서는 독자는 익숙한 습관대로 단어마다 쉼표를 찍는다. 고유명사들은 나란히 놓아질 때 제 값의 쉼표를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가진 호흡이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것을 파괴한다. 체득된 문장부호조차 봉변을 당한다.
굉장히 불편하고 불친절한 소설, 그런데도 사로잡힌다. 도망치기 어렵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문장은 무심하게 아름답다. 힘을 다 빼버려서 강력하다. 목덜미를 휘감는 단어들은 그 낱말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인다. 무수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톡톡 튄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추구해온 그 소설들을 작가는 이렇게 야유한다 - 말하는 지겨운 이야기들, 처음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이야기들, 빛바랜 수사들, 다닥다닥 붙은 행간들.
다시 문장을 본다.
사람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과, 뒤꿈치에 막 올이 나가던 스타킹,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 내려다본 방금 오후 열두 시를 맞이한 거리,....... 그런, 일 초가 채 흐르기 전의 기억이 아련한 일상을 때때로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대개는 느리고 긴 파동을 타고 곧 흩어졌다.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일들, 은 세탁된 빨래처럼 곳곳에 가볍게 널렸다. 누구나 단 불로 삶은 빨래 같은 생활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니 그런 청정한 일상의 뒷면에서는 아무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바다를 찾지 않았다.
이런 문장들에서 우리가 익히 배워 온 소설의 구성, 소설을 이루는 구조 따위를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승자나 황인숙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문장들은 도처에, 아니 이 소설의 전면을 채운다.
시를 읽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그럼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그림자와 그림자들은 아무런 이야기도 내뱉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문장에서 ‘그림자’를 ‘의미’나 혹은 ‘이야기’로 바꾸어보자. ‘문학’, 혹은 ‘예술’ 따위로 바꾸어도 괜찮다. 소설은 황인숙의 시에서 메타소설로 갑자기 바뀐다. 이 소설에서 도처에 감춰진, 혹은 눈을 감은, 영리하게 감추고 무심하게 덮어버리는 문장들은 겹눈을 뜨고 있다. 문장들은 단자로서 반짝이지만 유기적으로 더 음흉해진다. 문장 사이사이, 감춰진 주인공, 보여주지 않는 주어를 찾는다. ‘문학’이나, ‘소설’이라는 낱말을 집어넣어본다. 그렇게 읽을 때, 오독될 수 있는 문장, 그 안에 감춰진 의미는 역설적으로 선명해진다.
한유주의 소설들은 그림으로 치자면 추상화다. 그것도 우리가 어느 정도 익숙하고 훈련이 되어 있는 칸딘스키나 미로가 아니라 마크 로스코 쪽에 가깝다. 기존의 미술이론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그 틀에 갇혀지지 않는 회화이다. 캔버스에는 구체화된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전면을 채우고 분할하고 섞이는 물감들, 오일들의 색감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림,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로스코는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인간 실존의 비극과 이것을 이겨내는 숭고한 정신을 이전의 회화가 보여주지 않은 방식을 통해서, 익숙했던 회화의 기법을 전복시키면서 표현한다.
<달로>라는 제목이, ‘이야기’가 되지 않는, '소설’이 되지 않는, 문학의 원래 모습을 지향한다는 말로 들린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가 보지 못한 문학, 고래로 누구나 그리워하고 노래해왔으나 지금껏 우리가 ‘발전’시킨 현란한 그 도구들, 과잉의 의식과 이미지가 그 달을 흐리게 한 건 아니었을까. 오해되지 않고 짓밟히지 않은 그 달로 가고 싶어 하는 손짓은 아니었을까.
그의 말대로 한유주는 이 좌표에서 저 좌표로 몸을 조금 움직이는 - 그것이 새로운 문학의 사조이고 지향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온 우리에게, 보란 듯이 곧바로 강의 건너편으로 건너간, 조그만 움직임 따위는 도무지 신경도 안 쓰는 새로운 소설가가 되나보다.
문학의 죽음(어느 검은 테가 둘러진 액자)를 말하는 시대에서 그는 그렇게 걸어 나온 궤적을 눈으로 좇고 있다. 쓸데없이 떠도는 그런 말들의 홍수에서 나는 지쳤다. 차라리 나는 그냥 내게 보이는 달을 보고 말래. 너희들의 부유하는 말들, 그 난삽한 소음들은 정말 질렸어! 하고 부르짖으며.
제목: 달로
지은이 : 한유주
펴낸 곳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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