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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규장각

<천릉지문> 중 (2)- 대리청정과 영조의 서거

by 소금눈물 2011. 11. 7.



영조께서 연세가 점점 높아갈수록 편찮으실 때가 많았는데, 선왕께서는 10년을 병간호하시면서 밤낮없이 곁을 떠나지 않아 잠시 옷을 벗을 겨를이 없었으며, 병환이 조금 더 심하기라도 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기도를 하셨다. 앉고 눕고 하는 모든 기거를 몸소 다 보살폈으므로, 영조께서 왕세손이 너무 고달플까봐 혹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다가도 금방 짜증을 내시면서 "왕세손이 할 때 만큼 내 몸이 편치 못하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화완옹주는 선왕의 고모였는데, 그의 아들 정후겸이 옹주를 믿고 제멋대로 굴었고,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은 자기 형 덕으로 재상이 되어 영조께서 정사를 소홀히 하시자, 서로 짜고 무리를 모아 권력을 농단하여 조정을 어지럽혔다. 이들은 선왕이 영특한 것을 싫어하여, 궁중에 드나들면서 기회를 엿보아 선왕을 모함하려 하였다. 화완옹주 또한 궁중에 눌러앉아서 자기 아들을 위해 흉계를 도왔지만, 선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조용하고 태연하게 대처해 나갔다.

영조의 병환이 더욱 심해져서 선왕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이들 역적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영조께서 공적은 사무를 동궁으로 들여가서 처리하도록 명하자, 홍인한이 손을 내저으며 승지로 하여금 그 지시를 쓰지 말도록 말리고 갖가지 말로 그를 저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영조께서는 마침내 홍인한 등에게 벌을 주고, 선왕으로 하여금 모든 정무를 대행하도록 명하셨다. 드디어 동궁으로 가셔서 하례를 받게 되었는데, 술잔을 아홉번 붓는 구작례를 행하고 뭇 신하들이 천세를 부르는 가운데 영조께서도 웃으며 매우 즐거워하셨다.

선왕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곧 상소를 올려 자신의 슬픈 마음을 개진하셨는데 그 내용이 매우 애절하였다. 영조께서 이 상소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고는, 담당 관리를 시켜 정축년(1757)부터 사도세자 죽던 임오년(1762)까지의 기록 중에서 차마 못볼 내용들을 모두 지워버리게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시기를, "왕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양자보내어 종통을 바로잡은 것은 3백 년 계속되어온 우리나라를 위해서이고, 일기의 기록을 지워버린 것은 왕세손의 마음이 영원히 풀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시고는 유시하는 글들을 짓고, 또 효성스러운 왕세손이라는 뜻에서 '효손'이라는 두 글자를 써 은으로 된 도장을 주조해 내리셨다. 이후 선왕께서는 모든 조회나 행차하실 때면 이 유시하는 글과 은인을 항상 앞에다 놓아 두셨다.

*<천릉지문>
노론시파의 핵심이었던 심상규가, 정조 사후 20년 후에 기록한 정조실록의 부록 중 한 편.

출처 <정조대왕의 꿈>
지은이 유봉학.
펴낸 곳 <신구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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