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기 사도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꿈을 깬 후 그 모양을 벽에다 그려두었는데, 얼마 후 선왕이 탄생했으니 영조 28년(1752) 임신년 9월 22일 을묘일이었다. 우는 소리가 우렁찬데다 콧날이 높으며 입이 크고 얼굴 생김이 범상치 않으셨다. 영조께서 와 보고는 몹시 기뻐하셨으며, 손으로 이마를 만지시면서 꼭 내 이마를 닮았다고 하시고 그날로 원손(元孫)이라 칭호를 정했다. 선왕은 백일이 못되어 일어나 섰고, 겨우 걷기 시작하면서는 앉아도 반드시 무릎을 꿇어 단정히 앉았으며, 말하기 전부터도 글자만 보면 좋아했었다.
3세부터 사부께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학]을 배웠고,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영조를 모시고 종로거리를 지나는데 사족과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세손을 바라볼 수 있게 조치한 일이 있었다. 궁에 돌아와 영조께서 물으시기를, "오늘 구경 나온 백성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이 너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니, 선왕께서 대답하기를 "제가 착한 일 하기를 바랐습니다"하셨고, 착한 일 하기가 쉽냐고 다시 묻지, 쉬울 것 같다고 대답하시니 영조께서 매우 기뻐하셨다.
10세 때 박사(博士)에게 수업했는데, 선왕은 [소학]<제사(題辭)>의 문구 중에 '명명혁연(明命赫然)'에 대해 그 뜻을 묻기를, "명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혁연(赫然)함을 구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셨다. 박사는 대답을 못했고, 둘러섰던 여러 사람들은 반색을 하면서, 참으로 성인(聖人)이라고 하면서 기뻐했다.
하루는 영조를 모시고 있을 때 강관(講官)이 말하기를 삼남지방에는 기근이 들어 백성들 얼굴빛이 누렇다고 했는데, 선왕께서 그 말을 듣고는 저녁 밥상에서 고기를 드시지 않았다. 영조께서 그 까닭을 묻자, "굶주린 백성들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에 차마 젓가락이 가지 않았습니다"라 대답하셨다.
선왕께서는 8,9세가 되면서부터 더욱 장중한 태도를 가지셔서 호들갑스럽거나 하지 않았으며 내시나 궁녀들에게 말을 거는 일도 별로 없었다.
영조께서 늘 이르시기를, "세손은 놀러다니려는 뜻이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궁궐 후원에 꽃이 만발하여도 나를 따라가는 경우가 아니면 한번도 가서 구경하는 일 없이 날마다 조용히 앉아 독서만 한다. 이런 일이 어디 억지로 되는 일인가, 바로 그의 천성이 그런 것이다"라고 하셨다.
*<천릉지문>
노론시파의 핵심이었던 심상규가, 정조 사후 20년 후에 기록한 정조실록의 부록 중 한 편.
출처 <정조대왕의 꿈>
지은이 유봉학.
펴낸 곳 <신구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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