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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大義)란 나의 존재 가치를 인간세의 보편적 가치로서 실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가치라는 것은 도덕적 실천에 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이라는 자기생명이 일차적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정욕생명이 강렬한 만큼, 도덕생명 또한 강렬한 것이다.
인간은 하루하루의 우환의식 속에서 도덕의식을 생산한다.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의 감옥에서 우환(憂患) 때문에 <주역>을 지었다고 한다. 그가 처한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고 간난(艱亂)의 시대였다. 천지의 대덕(大德)은 생명력에 있다. 천지는 무심(無心)하게 만물을 성화(成化)시키지만 성인은 천지만물의 위육(位育)에 대하여 근심하는 우환의식을 아니 지닐 수 없다.
그 비천민인(悲天憫人)의 느낌이야말로 성인을 성인다웁게 만드는 것이다. 우환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요, 욕망의 해탈을 위하여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계신(戒愼)의 경건한 태도야 말로 우환을 지니는 인간의 본연이다.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천지생명에 대한 외경을 배우는 것이며 그 일체생명의 일부로서의 자기생명의 겸손을 체득하는 것이며, 그 겸손을 통하여 천인합일의 성(聖)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내면적 도덕성이 상실되면 천명(天命)은 철회된다. 나라는 존재는 형이하학적 생물학적 개체일 뿐 아니라 가치를 체현하는 형이상학적 진실무망의 주체이다.
종교는 인간의 진실무망을 공포스러워한다. 인간을 항상 허환과 가상의 존재로 만들고 인간에게서 신성을 탈색시킨다. 그러나 우환은 끊임없는 각성을 통하여 신성을 회복한다.
p.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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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 비하면 왕을 교육시키는 제도가 잘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비슷한 놈들"은 너무 많이 나왔다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서양은 왕이라는 자들이 너무도 형편없는 정신박약자나 분열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귀족들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와 같은 왕권계약적인 제도적 장치를 개발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같은 얘기는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문제는 현실이다. 우리가 지금 반추해봐야 할 사실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정치지도자 중에서 세종이나 정조 만한 학식의 소유자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세종이 이 민족을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가치를 축적한 것의 총량만 해도 현재 민주제의 대통령 천 명을 합쳐도 모자랄 것이다.
부질없는 토목공사로 국민의 혈세만 축내는 짓, 종편채널이라는 당근 하나로 주요언론사들을 현혹시켜 언론의 제기능을 못하게 하는 짓, 어찌 이런 따위의 짓들을 정치지도자의 역량으로 시인할 수 있겠는가? 권력은 긍적적인 창조의 맥락에서 발휘되어야지 부정적인 콘트롤의 맥락에서 발현되면 안 된다.
p. 132-133
도올 김용옥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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