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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밑줄긋기

눈의 역사 눈의 미학

by 소금눈물 201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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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미술에서 미소가 등장하는 것은 이집트의 역사가 저물어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러 모든 계층을 위한 장례용 초상화가 유행하면서부터이다. 하부 사람들 얼굴까지 있는 그대로 재현했던 이 장례용 초상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들 입가에는 미소(물론 대부분 슬픈 미소다)가 떠오르고, 그들의 눈가에도 잔잔하면서 우수를 깃들인 미소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소가 깃들인 얼굴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역사가 '인간화'되어간다는 것이다.

 

p.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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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 바로 햄릿이다. 벤야민과 라캉은 햄릿의 우수(憂愁)를 근대성의 계기, 바로 그 계기의 표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비극적 주인공의 '고양된 자기비판', '자아의식의 분열'은 '근대적' 개인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헤겔의 '불행한 의식', 더 나이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의식의 파편화'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p.25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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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는 그 무엇보다도 전환기였고, 그런 점에서 르네상스인들도 '방향을 상실한 인간'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인간을 찬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 등장하는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존재였지만, 햄릿에게는 인간이라는 이 "영광스러운 창조물"도 "결국 한줌의 티끌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 스타로뱅스키는 "르네상스는 우수(憂愁)의 황금시대"라고 했으며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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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와 르네상스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진실은 오히려 역설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가. 흑사병, 가톨릭 교회의 대분열, 백년전쟁, 기근, 지옥, 악마, 마녀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이들의 삶은 어쩌면 우수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 여기서 인용되는 '근대의 올 익은 대변자 ' 뒤러- 뒤러의 판화들을 기억할 것.

<멜랑코리아 1>의 검은 태양과 우울한 천사. 1514년 작품.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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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부어오른 발을 의미한다는 것은 발이 처음부터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즉 '부어오른 발'은 오이디푸스의 정체인 버림받은 불구의 존재, 말하자면 존재의 불구성(不具性)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구성은 곧 인간 존재의 불구성, 즉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가 밝혀질 때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의미는 '나는 발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나는 안다'를 의미하는 오이다(oida)와 '발', 즉 푸스의 합성어로서 이때의 오이다는 '나는 본다'는  그리스어 현재동사인 에이돈(eidon)의 과거형이다. '나는 보았다'는 의미이지만, 보통'나는 안다'는 현재동사의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발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시각적인 경험을 토대로 '인간을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수수께끼는 '발'의 정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은 인간을 규정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땅 위를 걷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통기>에서 헤시오도스는 이것이 신들과 인간들 간의 가장 큰 차이라고 했고(272행),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V442행). 헤시오도스는 또한 인간은 '발'로 땅 위를 걷기 때문에 신들과 달리 불멸성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오이디푸스의 발이 불구성을 상징하듯이 인간 육체의 고유한 불완전성, 더 나아가 인간 존재 자체의 고유한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에게 밝힌 '발'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이었다. 베르낭은 비극적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다르면서 "인간은 기술될 수 있거나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의 문제, 이중(二重)의 의미를 다함 없이 지닌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인간의 정체를 밝힌 오이디푸스도 하나의 문제, 하나의 수수께끼다. 위대함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p. 36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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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권위를 표상하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은 인간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경고했다. 그리스에서 신과 인간의 차이는 신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힘이란 곧 신들의 불멸성을 가리킨다. 존재의 불멸성이 그들을 인간과는 다른 존재,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안티고네>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코러스는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노래한다(360행). 그렇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펼치는 '앎' 또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은 인간의 한계, 곧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다. 그리고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얻어진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존재의 신비를 재단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경고는 철저한 보복과 결부되며, 아폴론은 이름의 어원이 말해주듯이 '파괴'라는 의미와 결부된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폴론'에서 '파괴'를 뜻하는 아폴(apol)의 어원을 끌어낸다. 가령 그의 <아가멤논>에 등장하는 카산드라는 "아폴론 ..... 당신은 나를 파괴한다 (Apollon .... apolesa)" (1.081~1.082행)며 한탄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드푸스가 아폴론이 자신을 아폴리나이(apollynai)한다고 할 때 (1.441행), 아폴리나이도 '파괴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는 "나에게 잔인한, 이 잔인한 고통을 가져온 이는 아폴론이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아폴론은 철저하게 오이디푸스를 파괴한다. 오이디푸스는 철저하게 패배하고 이를 통해 그 신의 권위는 회복된다.

 

p. 367-368

 

 

임철규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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