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자 틸리히는 '오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브리스(hubris)'는 '자신'을 신만큼 '높이고자 하는' 태도나 행위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아이아스는 오만의 전형이다. 아테나는 "신들은 악한 자들을 증오한다."고 했다. 신들에게 '악한 자'(kakos)란 다름 아닌 오만한 자다. 이에 아이아스가 신들의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테크메사의 말처럼 그는 결국 "그들<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신들의 손에 죽었다".신들이 이끄는 승리를 가장 영광스럽다고 여겼던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들 가운데 소포클레스가 창조한 아이아스만이 신들의 존재와 그 본성을 의심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신들의 보복은 가장 잔혹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은 감히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는 아르고스의 왕 디오메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신들과 동등하다고 결코 생각하지 말라. 불멸의 존재인 신들과 땅 위를 걷은 인간들 사이에 닮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아이아스는 자신이 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즉 이러한 오만이 아테나의 보복을 불러왔던 것이다.
p. 242-243
<아이아스>
-----
*
유모에게 데이아네이라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듣게 된 코로스는 "여성의 손이 어찌 감히 이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유례없이 '남성적인'데이아네이라의 자살에 놀라움을 표한다. 로로가 지적했듯, 데이아네이라의 죽음은 호메로스의 전사들의 '남성적인' 죽음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 영웅의 '영웅적인' 신체 부위"이자 분노가 자리 잡는 기관인 '간'을 찌름으로써 "격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비극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이러한 데이아네이라의 자살은 통상적으로 목매어 자살하는 그리스 여성들의 방식과도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작품 속에서 스스로 칼로 찔러 자살하는 다른 여성인물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 방식과 대담함이 극적인 만큼 데이아네이라의 죽음은 그녀의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분노가 외면화(外面化)된 사건이라 볼 수 있으며, 이 분노는 데이아네이라 개인만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성 전체가 폭력적인 남성의 욕망과 남성중심적인 '결혼'제도에 의해 희생당하며 내면화했던 분노, 즉 한낱 여성이 아니라 대문자 여성으로서 데이아네이라가 표출해내야만 했던 분노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유모가 들려주는 것처럼, '지상에서 영원히 이별할' 남편에게 단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지켜온 '집'과 그 집에서 보낸 자신의 삶만을 슬퍼했던 데이아네이라는, '집 안'의 존재인 여성의 삶 자체에 분노와 회한을 가졌던 것이다.
데이아네이라는 이러한 분노를 호메로스의 전사들의 죽음과 같은 가장 '남성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웅적인' 형태로 표출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적인'조건을 뛰어넘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다. 데이아네이라의 비극적인 운명이 그녀 자신의 선택 보다는 외적인 힘, 즉 네소스의 복수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의 힘, 도도나에서 받은 신탁을 통해 헤라클레스의 죽음을 예언한 제우스의 의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해도, 데이아네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손"으로 간을 찌르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단순한 운명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법이 되는'(autonomos)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p. 259-260
<트라키아의 여인들>
---------
*
헤겔에게 국가가 남성의 고유 영역이라면 친족은 여성의 고유의 영역이며, 즉물적이고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개인 표현 수단이며, 사적인 윤리단위다. 헤겔은 사적인 윤리 단위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친족의 법'을 '보편성의 법'인 '국가의 법'과 대조되는 "개별성의 법"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가족의 가치와 권리를 직관적, 본능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여성을 '자연', 또는 자연적인 것과 결부시키며, 반대로 남성은 '문화'와 결부시킨다. 따라서 여성을 자연적, 무의식적, 불확정적인 존재와 동일시키는 헤겔은 남성의 특권 영역인 '문화'로부터 여성을 배제시킨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 간의 갈등은 여성 원리와 남성 원리, 즉 '자연'과 '문화'간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최고 형식은 다름 아닌 '폴리스'라 할 수 있는데, 안티고네의 도전은 바로 남성 원리의 표상인 '폴리스'에 대한 도전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p. 284-285
*
대지의 신성함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관심을 염두에 둔다면,그에게 "안티고네는 .......... 대지와의 보다 진정한 관계를 위해 국가체제의 기술적- 이성적 지배에 도전하는 인간존재를 표상"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크레온은 대지를 하나의 "정치적인 영토"로 보고 있지만, 안티고네는 그것을 "고향으로, 하계의 신들의 거처를 위한, 그리고 ........ 죽은 자들의 매장을 위한 장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p.327
*
극의 초기에 코로스는 "그대 이름이 안티고네일 때, 그대가 행할 역할은 하나 있다. 그리고 그대는 끝까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안티고네가 끝까지 행할 역할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다.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그녀의 운명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은 '죽음이 그녀의 목적이었다'는 크레온의 이야기와 다시 한 번 모순 없이 어울리고 있다."
p. 341
*
반면 안티고네는 어떤 타협이나 자기 포기의 가능성을 영원히 봉쇄하는, 도전적인 자세에서 영웅적이다. 소포클레스 주인공들의 행동의 동기는 저마다 각기 다르지만,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려는 그들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파토스'에서 나온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행동의 동기가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사랑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보았다. 자신을 인도하는 내면의 도덕적인 빛은 '사랑'이라는 파토스다.
이 '파토스'에 압도된 채 안티고네는 완전한 고립 가운데(880-882행) 홀로 (monos) 자신의 원칙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스 비극의 다른 여주인공들과 달리 안티고네 곁에는 그녀를 위해 격려하고, 그녀를 동정할 여성 코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이스메네에게서도 고립되어 있었다. 안티고네는 어떤 인간과 신들, 그밖의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은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거부'의 종착지다.
p.344
<안티고네>
------------
임철규 <한길사>
'그룹명 > 밑줄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로 읽는 세계사 (0) | 2012.11.19 |
---|---|
눈의 역사 눈의 미학 (0) | 2012.06.02 |
그리스 비극 -4 (0) | 2012.02.28 |
그리스비극 3 (0) | 2012.02.11 |
그리스 비극 -2 (0) | 2012.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