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의 말대로 그(프로메테우스)의 저항은 "희망없는 반항"일지도 모른다. 단 한 명의 인간도 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위대성은 그의 희망 없는 반항 (Jan Kott, The Eating of Gods)"에 있다는 그의 주장에서도 알 수 있듯,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순교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예거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은 개인적인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영적인 선구자의 고통"을 표상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코로스에게 자신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 아니기 때문에" 제우스를 두려워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933행)고 말한다. 그리고 제우스 역시 운명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며 훗날 제우스는 올륌포스의 권좌에서 쫓겨나고 (940행, 966행) 현재의 자신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 (931행)이라고 예고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갖는 의미 그대로 제우스의 운명을 '먼저 알고 있다.' 어쩌면그가 제우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제우스의 운명을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 즉 자신이 제우스와 마찬가지로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키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댓가로 자신의 '불멸'을 포기했다. 즉 그는 인간들처럼 죽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경우 그의 불멸은 고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운명의 조건이자 제우스의 의지인 것이다. 그는 죽음을 초월하고 있는 불멸의 존재인 신이면서도 필멸의 존재인 인간보다 더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키론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가 고통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 '고통의 신' '프로메테우스'로서의 그의 정체와 가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들을 '하루살이'의 가치만을 지닌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인간들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수 있으며, 따라서 죽음은 역설적이게도(특히 아이스퀼로스에게는) 하찮은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자 그들에게 허용 되어지는 최고의 특권이다. 어쩌면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성은 그에게 죽음이라는 선물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바로 그의 불멸성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195-196 임철규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