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손은 네 아비가 죄인이냐 아니냐를 추궁하는 내게 물었다.
진심으로 묻는 것이냐고,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에 품고 있는 진정을 묻는 것이냐고.
말 한마디면 안온하게 빠져나갈 그 말을, 손자는 거부했다.
내가 무죄한 임금이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한 물음을, 아이는 알아주지 않았다.
네 아비는 죄인이라고,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진노하는 내 말에 아이는 눈물을 흘렸지만 제 말을 고치기를 거부했다.
그 얼굴이 무섭고 미웠다.
제 아비를 향한 지극한 사모를 내 이미 알았거니, 그것은 아비를 죽인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었을게다.
중신들이 어찌 왈왈대고 떠들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다만 이 아이의 대답, 나를 믿고 이해한다는 그 한마디가 나는 듣고팠다.
꿋꿋하게 제 말을 지키는 아이를 내쫓았지만 나는 그 아이가 무서웠다.
그 아이의 진정에 나는 원망스럽고 잔혹한 늙은이일 뿐이었다.
내가 저를 어찌 사랑하고 지키려 애쓰는지, 승냥이 같은 이 조정 권신들에게서 핏줄을 두번 다시 잃는 고통을 맛보지 않으려 내가 어찌 고독하고 아픈지 저는 몰라주었다.
저 아이가 임금이 되면, 제 "진정"을 펼칠 때가 되면 세상엔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러면 저 아이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아비를 죽인 것은 나지만, 그렇게 죽은 아들을 죄인으로 못박아 저를 지키려 함을 저 아이는 알아주지 않는다.
냉혹하고 무정한 임금, 그 뿐이었을게다.
그것이 무섭고 미웠다.
그런데,
아들을 지키던 익위사들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지경에도 나를 보고, 감히 임금인 나를 보고 의로운 아들을 죽인 패륜애비라 했다.
아들을 죽이고 또다시 손자마저 죽일 생각이냐고 했다.
아들은 죄인이었다.
나는 사사로이 아들을 둔 애비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 종묘사직을 지켜야 할 임금으로서 자질이 없는 죄인을 죽여 화란의 근원을 끊었다.
종묘사직의 안위와 임금의 지존한 권능 앞에 아들은 그렇게 죄인이었다.
그들이 눈을 부릅뜨고 피맺힌 목소리로 나를 아들을 죽인 인간이라 부르짖어도 나는 게의치 않았다.
아이는 증거를 들고 왔다.
단 사흘만에.
그리고 소리높여 내게 부르짖는다.
내 아들의 아들이 지금 나에게 나는 그 날 죄없는 아들을 죽인 애비였다고 한다.
조정의 온 공신들이 모두 나와 더불어 아들을 죽이라 죽이라 했다.
그것을 나는 하늘의 명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고, 내가 틀렸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은 이 나라 종사를 위협하는 무리들의 간교한 음모였다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냐.
나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았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으며
울부짖으며 무고함을 아뢰던 아들을 생으로 죽여버린 것이 아니냐.
이 조정의 권신들이 간악한 흉적이었다면 나야말로 그 흉적중의 흉적이 아니었느냐.
무섭다.
어지럽다.
나는 저 아이의 입을 통해 쏟아져나오는 진실이 기막혀 몸이 떨리게 무섭다.
땅속에서 일어나 저 아이의 몸 밖으로 나오는 내 아들의 울음이 나는 무섭다.
피를 토하듯 이 아이 절규한다.
이제 믿어주겠냐고, 제 아비의 충정과 저의 충정을 믿어주겠냐고.
내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죄였는지 알겠냐고 아이는 절규한다.
나는 말하지 못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들의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뒤주 속에서 죽어간 바로 내 아들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믿어달라고, 어찌 아들의 말은 한사코 밀어대고 진노하면서, 간악한 간신의 음모에 빠져 나를 죽이려느냐고 울며 매달리던 내 아들, 죽은 그 아이의 말이었다.
왜 몰랐던고.
참담한 마음을 감추려 했으나 그 아이를 지켜주던 충직한 익위사를 위로하려 벌인 연회였는데.
그 마음을 왜 나는 또 잊고 아들을 두번이나 죽이려 했던고.
그 아이가 죽으면서 지키려한 저의 아들을, 왜 나는 또 죽이려 했던고.
그러면 무엇이냐.
나는 지금까지 내가 판단하고 믿어온 그 무엇이 잘못되었더란 말인가.
누가 죄인인가.
내가 죄를 몰아 죽인 내 아들이 죄인인가
종묘사직을 지킨다는 구실로 의로운 국본을 죽여버린 내가 죄인인가.
그랬던가...
그랬던가...
'그룹명 > 규장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난 용 (0) | 2011.11.07 |
---|---|
얼굴들 (0) | 2011.11.04 |
홍국영, 다음 대의 제왕에게 배팅하다 (0) | 2011.11.04 |
아아 왕이시여 (0) | 2011.11.04 |
야망의 두 남자, 불꽃튀는 첫 만남 (0) | 201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