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서고에 단 한 사람의 이름을 남긴다면 그가 '박정만'일 것이라고 했다. 외롭거나 지칠 때, 글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때나 고플 때 찾는 이름. 나날이 가슴은 메마르고 심중이 괴로울 때 찾아가는 대청마루 같은, 나른한 가을햇살 쏟아지는 주인없는 마당같은 말들, 박정만.
요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늦가을밤, 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 책장 술에 절어 비척이며 걸어가는 그의 등이 보인다. 그런 밤은 더 쓸쓸해져서 주인도 모를 눈물이 나고.
이제는 찾으려도 찾을 수 없고 살려고 아무리 맘을 써도 살 수도 없는 책. 시인은 죽어서 별이 되었을까. 아니 아니, 그가 그리 그리워하던 그 노곤한 대청마루를 찾아갔을까.
책의 말미 산문에 그가 남긴 말이 가슴을 친다.
더는 내 말을 남길 수 없음이다.
그후 나는 이날 이때까지 홀로 햇빛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데, 공해로 찌들은 햇빛마저 찬란하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해 다 하지 못한 내 죄의 형량만 크다. 이제 모든 세월은 갔다.
나를 걸고 넘어진 모든 여자들, 그래봤자 두 명, 그리고 나를 눈물로 축나게 했던 40세의 광야. 다시는 더 큰 고통 위에 쌓이지 않고, 다시는 슬픔이 더 큰 슬픔 위에 쌓이지 않으리라고 믿고 기대했던 나날들, 이제 그것들로 망각의 저편으로 묻어 버릴 차례인 것이다. 원컨대 다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그리워하는 일과, 기다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소서.
- 산문 <사랑아, 내 마지막 눈물로 그리움의 나라에 가고 싶다> 끝머리에서.
제목 : 쓰라린 세월
지은이 : 박정만
펴낸 곳 :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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