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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규장각

야망의 두 남자, 불꽃튀는 첫 만남

by 소금눈물 2011. 11. 4.



권세 없는 동궁 시강원 설서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자리였을까요.
노론 홍문(洪門) 천하에서, 아비 홍낙춘은, 말만 홍가이지 집안의 눈치꾸러기였으니 그 아들 또한 출사를 해보았자 겨우 양반에 이름만 걸친 신세.
푼돈 마련해 벼슬자리 구걸이나 하러 다니고 있으니 도포짜리 한량이나 다름없지요.

숙위하던 어느날, 한심한 익위사를 질책하는 세손의 모습에서 그는 그의 왕재(王材)의 비범함을 알아보았습니다.
푼돈벌이로 무과를 꿈꾸는 왈자들에게 병법궤도(詭道)를 가르쳐주었는데 어쩌다가 그 왈자 중 하나가 병판의 청지기에게서 이상한 글자를 시제로 훔쳐왔지요.
그게 지금 조정을 발칵 뒤엎은 역모의 단서였다는 걸 알아챈 홍국영.
백척간두 위기에 몰린 세손은 모함에 빠진 것이었군요.

허나, 이 일은 누구에게 발고해서도 안되고 해 보았자 알아주기는 커녕, 쥐도새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 일이라는 걸 아는 눈치빠른 홍국영.
그런 자신에게, 누군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조정에 출사한 도포짜리 치고 천하의 정후겸을 모를 이 없지요.
서인 출신이지만, 남편이 일찍 죽어 후사가 없는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얻게 된 조정의 총아.
타고난 명석함에다 좌우에 세도가의 비호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차에 승차를 거듭해 젊은 나이에 승지에 올라 임금을 조석으로 배알하는 사내.
속에 품은 생각을 도무지 알아챌 수 없게 늘 모호한 웃음을 짓지만 서늘한 냉기를 끌고 다니는 이 사내.
무슨 일로 국영을 부른 것일까요?
집안 사람인 홍인한도 거지취급하며 내쫓은 국영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면서 눈 하나 깜짝 않는 이 사내의 배포가 여간하지 않다는 것을 후겸도 단박에 알아챘습니다.
그릇이 범상치가 않다는 것은 홍인한의 집에서 감잡았지요.
앉은 면전에 대놓고, 당신 죽을 날만 기다리겠다, 당신처럼 썩은 이가 조정에 차고 앉았으니 어찌 세상에 나가볼까냐고 거침없이 내뱉고 박차고 나갈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릇이 간장종지 만한 홍인한이야 펄펄 뛰었지만 후겸은 그 재기를 알아보았습니다.



첫 인사부터 거친 입말을 던지는 홍국영.

갓쓰고 밭을 갈던 제 멋에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단하기 차돌 같은 이 미관말직의 인사가, 천하의 정후겸을 앞에 두고도 거침이 없습니다.



내노라하는 권세가를 다 만나보았고 주상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후겸.
이렇게 기세가 당당한 사내는 처음 보았습니다.
과연, 굴러다니는 돌 속에서 옥을 찾은 걸까요?



마주 앉은 두 사내의 눈빛이 공중에서  쨍 하니 부딪습니다.

확실히 눈에는 띄었지.
네 당찮은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느냐.
나는 신중한 사람이다.
네가 말만 요란한 돌덩이인지, 야망에 어울리는 그릇일 지는 내 아직 모르겠다.

 
재주를 보여달라는 말씀이시온지?



얼마전 사간원 서경에서 당신이 내친 대사간의 자제.
시전의 공가를 조사해보라, 지금 그가 창고를 어찌 불리고 있는지.



거침없는 국영의 말에 후겸의 뒷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이름없는 동궁 시강원설서가 조정 돌아가는 흐름을 손바닥에 얹고 보는데다, 자신이 조정을 농단한다는 말이 되기도 하니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는 속이 참으로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허나 인물을 얻으려면 이런 거친 소리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요.



허나 이 사내, 사간원 정언 자리를 제의받고도 냉큼 엎드리기는 커녕, 생각해보겠답니다.



생각이라니, 어찌 생각이 필요한가?
고작 시강원 설서 주제에 평생을 굴러봐야 네가 언감생심 가당키나 하겠느냐
도대체 네 놈의 배포는 어디까지냐 기가 막힌 정후겸.



이런 파격적인 제안을 할 때에야 저에 대해 알아보셨겠지요?
허니. 저 또한  나으리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점점 더 기가 막히는 정후겸.
이놈이 지금 나를 알아보고 시험을 하겠다?
네 주제에 어울리는 윗전이 될지 재 보고 수하로 들겠다?



개를 따라다니면 측간으로 가고, 범을 따르면 숲을 얻기 마련이다.
측간으로 갈 지 숲을 얻게 될 지 따져봐야겠다.

거침없이 일갈하는 이 사내.
후겸은 대꾸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 사내의 선택에 따라, 자신이 개가 될 수도 있고 범이 될 수도 있군요.



사흘 말미를 얻어 나오는 홍국영.
이만한 자리를 미끼로 던질 때에 저들이 자신의 어떤 재주를 노리고 있을 지 짐작이 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 가에 따라 사내로 태어나 세상을 호령해보는 권세를 얻을지, 여차하면 충성 받치다 쓸모 없어지면 가차없이 내쳐지는 대사간 김영감 꼴이 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지 결정이 되겠지요.



인재를 얻으려다 불화로를 덮어씌인 듯한 모욕감을 느낀  정후겸.
내로라 하는 인물은 다 만나보았지만 이런 말을 면전에서 지를 만한 인사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의 맺고 끊음이 이치에 또한 맞아 반박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습니다.

 

잘 살피거라.
내 편이 될 수 없다면 싹 조차 틔우게 해서는 안될 놈이다.

서늘한 기운이 일어납니다.
제대로 된 맞수를 만났다는 본능적인 예감을 후겸은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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