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는 꿈을 꾸고 계십니다.
어렴풋이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
저하.. 저하...
일어나라고... 우리들의 목소리를 기억해달라고...
꿈결인 듯 아득하면서 생생한 그 어린 목소리들...
식은 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난 저하.
창밖은 아직도 뜰에 걸어놓은 등불의 희부윰한 빛이 어리는 삼경.
누구였을까...
누가 그토록 간절하게 나를 불러 깨웠을까...
또 그 아이들 꿈을 꾸셨나봅니다.
잠깐 스친 그 짧은 인연의 동무들.
아무런 이익도 기대도 없이 그저 흔연한 정으로 동무가 되어 그 믿음을 신실히 주었던 어린 동무들.
저하는 그 어린 시절의 따뜻한 친구들을 오래 잊지 못하셨나봅니다.
그런데, 얼핏 스치는 이 찬 기운(寒氣)은?
위협과 모함에 단련된 몸이 반사적으로 사기(邪氣)를 알아챕니다.
아니겠지...
그래도 궐의 가장 안 쪽 내밀한 동궁이거늘, 감히 어느 누가...
꿈결에 예민해진 탓이라 마음을 다스립니다.
모두 다 잠든 시간...
기울어 졸고 있던 달도 그림자를 반쯤은 가린 깊은 시각.
누구일까요.
복면의 한 사내.
동궁의 앞 뜰에 엽전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미리 약속이 되었던 듯, 익위사의 눈빛이 반짝 빛납니다.
아니 어딜 가는 걸까요?
동궁을 지키는 익위사들 아니었던가요?
기다렸던 듯 발걸음이 빨라지는 복면의 사내.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익숙한 곳인 듯 괴한은 바로 세손의 처소로 달립니다.
어찌하려고!!
익위사는 그렇다 치고, 나인, 궁녀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다음 위의 주인이신 세손 저하를 이렇게 무방비로 두고 그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저하의 침소로 뛰어든 괴한
참람하게도 저하의 이불 위로 바로 칼을 내리꽂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무인의 본능적인 느낌으로 사람의 몸이 아님을 알아챈 괴한.
이부자리를 황급히 걷어보니 세손의 몸이 아닌 위장한 베개였습니다.
분명히 세손은 여기에 자고 있어야 하는데!
빠져나간 흔적이 없었는데!
이때 바로 들리는 인기척.
날아오는 목소리.
누가 보내서 왔더냐!
어둠속에서 나타난 흰 옷의 청년.
목소리는 낮았지만 기품과 위엄을 갖춘 힘이 있었습니다.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 않는 결기와 침착함.
오히려 칼을 쥔 손이 떨리고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누가 내 앞을 가로 막느냐!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뱉은 순간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이 방에 오늘밤 쳐들어온 목적, 바로 그 주인이라는 것을.
이 방안에 있는 내가.. 누구겠느냐!
세손의 입가에선 희미한 미소가 배어나옵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싸늘하게 굳어버립니다.
난, 네가 죽여야 할 동궁, 이산이다!
어떻게 될까요.
우리 저하는 홀홀단신, 호위무사는 커녕, 계집 나인 하나도 없는 텅 빈 처소, 칼을 치켜들고 있는 저 자객 앞에서 저하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담대할 수 있는 걸까요.
종사관 나으리는 다모 계집 하나로 평생 깊은 잠을 못 주무셨다 하시더니, 우리 저하는 무슨 죄로 아비를 그렇게 잃고 잠자리를 도둑질 당하며 생명까지 위협을 당하신단 말이오 ㅠㅠ
'그룹명 > 규장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아 왕이시여 (0) | 2011.11.04 |
---|---|
야망의 두 남자, 불꽃튀는 첫 만남 (0) | 2011.11.04 |
天崩 (0) | 2011.11.04 |
왕의 묘호, 종(宗)과 조(祖)에 대하여 - 2 (0) | 2011.11.04 |
왕의 묘호, 종(宗)과 조(祖)에 대하여 - 1 (0) | 201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