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주조 깍정이패들에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드디어 할바마마 어가와 만났습니다.
감히 왕의 어가를 막는 죄를 범하면서 눈물로 아비를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궐에서 달려온 파발마가 아비의 죽음을 전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믿기지 않는 말에 세손저하는 넋을 잃었습니다.
아니되옵니다 아바마마.. 이렇게 소자를 두고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소자가 서경을 다 배우면 상을 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격구도 가르쳐준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아바마마께 활을 잡는 법도 다 배우지 못했는데...그리고... 후원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도 지어준다 하셨는데...
그랬는데... 그랬는데...
다정했던 아버지...
그 무릎에 앉히시고, 밀떡 같은 손이 여물기도 전에 붓잡는 법을 손수 가르쳐주시던 아버지
언제나 자애롭고 다정하시던 아버지...
왜 사람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몰랐을까요.
왜 할바마마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물리치려만 하셨을까요.
서툰 활질도
든든한 아바마마가 있어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저하도 아바마마처럼 저 무거운 활을 마음껏 쏘실 테니까요.
그 때는 아버지처럼 열 발, 스무 발, 쏘는 족족 관중일 테니까요.
아바바마와 함께 걷던 후원의 햇살.
그 부드럽던 빛을 잊을 수 있을까요.
살아가는 나날 내내 저 햇살의 추억은 쓸쓸한 그림자로 남을텐데
혼자 남은 우리 어린 저하, 어쩌실까요.
아버지께서 눈으로 그리시고
그 그림은 저하의 마음에 그대로 남았는데...
아. 아버지...
아바마마...
지존의 몸이라 하시나 이제 겨우 열 한살.
방금 아버지를 잃은 가엾고 불쌍한 동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임금이 되실 분인데도 이렇게 울고 있는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잃는 슬픔이 무엇인지,
왜 저 아이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아버지를 죽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울고 있는 가엾은 세손저하를 보면서 대수의 마음도 도무지 형언할 길이 없는 슬픔에 빠집니다.
세상엔 이렇게 무서운 일도 있는데,
그게 하필 저 착하고 용감한 저하의 일이라는 것이 송연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도무지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시울이 자꾸 붉어집니다.
아니되옵니다 아바마마..
이렇게 소자를 두고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이 슬픔을 어린 저하는 어찌하지 못합니다.
이 작고 슬픈 어깨를, 이 날의 고통과 절망이 평생으로 끌고 가게 할 것입니다.
정조는 일찌기 사도세자 사건(임오화변)에서 "개인으로서 말할 수 없는 애통한 마음"을 경험하였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존재했기 때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한" 채 평생을 "돌아갈 곳 없는 곤궁한 사람과도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정조는 영조가 "삼종(효종- 현종 - 숙종)의 혈맥"을 이을 수 있는 자신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제거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자신을 표현하여 "하늘을 꿰뚫고 땅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서 죽지 못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홍재전서> 권 16 현륭원지
-인용 박현모著 <정치가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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