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선생이 노래한 ‘그 사람’을 종철은 가졌다 믿었고, 그에 대한 신의의 표시로 대신 죽었다. 그가 무덤까지 가져간 '그 사람'인 박종운은 지난 총선 당시 386의 대표기수임을 자임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개탄하며 그해 6월의 거리에서 사람들을 독려했던 정치인 세 사람은 차례로 대통령이 되었고, 학생회장들은 줄줄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종철에 의해 삶을 빚진 ‘그 사람’들은 과연 종철의 신의에 보답하고 있는가. 종철이 스물 셋 청춘에 꾸다 만 꿈을 그들이 이뤄내고 있는가.
박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에 84학번이다.
“대학생이 약자의 서러움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 아이가”정도의 의협심을 가졌던 청년은 독재정권이 난폭해질수록 사상과 조직이라는 무기를 빠르게 흡수해가기 시작한다. 가두시위에서 늘 앞장서는 우직함과 언어학과 과대표로 1학년 전체 시험거부 투쟁을 이끄는 책임감으로 인해 그는 시간이 갈수록 독보적인 학생운동가가 되어갔다.
우리가 늘 사진에서 보았던 고집스런 입매처럼 그의 성격도 다소 융통성이 없었다. 농활을 가서는 새참을 먹지 않겠다고 버티고, 과 학생회장을 하면서 소비문화를 배격하겠노라 학우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벗을 위해 목도리도, 신발도 다 벗어주고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주면서 씩 웃어버리고 마는 정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공장 활동과 노학연대 투쟁 속에서 단련되던 그는 86년 봄에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집회에 가담했다가 연행되어 구속을 당하고 만다(전에 이미 두 번의 구류 경험이 있었으므로). 부산에서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아가던 아버지는 막내의 행동에 기겁했다. 종철은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한편 감옥에서 독서와 요가로 석 달을 보내고 나온다. 그는 자기 동지들에게 감옥살이를 자랑하며 말했다.
“나는 이제 내공이 몇 갑자는 깊어졌으니까 어떤 고문도 견딜 수 있다.” 종철의 이 말을 친구들은 평생 기억하게 된다.
- [오마이뉴스 2004-01-14 12:12] 오준호 기자의 기사 중.
세상이 아무리 더럽게 변해가도
다른 건 다 잊어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이름.
아직,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가치,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끝끝내 지켜야 했던 그 무서운 마음을
나는 가져본 적이 없지만.
이 비겁함에도 당신은 살아서, 당신의 이름은 살아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버리지 못할 희망으로 서 있자고
그런 얼굴들 중의 하나라도, 그 만큼의 몫이라도 하자고
이렇게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보내며 울리던 그 종소리가 아직도 선연하게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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