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고향에 다녀왔다.
그리 먼 곳도 아닌데 얼마만에 갔는지...
훨씬 더 먼 남도는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왜 이렇게 고향은 멀고먼지.
나는 기억나는 친구들이 별로없다.
동네에 또래가 없었는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떠났으니.
기억나는 사람들은 없다 해도 나를 낳고 키워준 고향은 잊은 적이 없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 지금은 독새풀이 올라오겠구나, 모내기하는 들판이 참 이쁘겠구나, 지금쯤이면 상수리가 떨어질텐데 - 그런 생각을 했다.
한번 가 본다 가 본다 하는 걸, 마침 친구가 부여는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해서 일요일 오후에 다녀왔다.
대전을 벗어나 논산으로 들어서는 길 부터가 벌써 헷갈리고 있었다.
없던 큰 도로가 여기저기로 뚫리고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아파트가 쑥쑥 들어섰다.
부여에 들어서는 더 했다.
백제대교를 건너 바로 왼쪽으로 꺾어지던 길이 아예 접근이 안되게 만들어져 한참을 더 가서 돌아와야 했다.
기억은 자꾸 엉켰고 걸음은 흐려 주춤거렸다.
일제시대에 쌓았다는 긴 제방, 어렸을때는 그렇게 높고 긴 언덕이던 강둑은 왜 그렇게 낮아졌는지.
한때는 배를 타고 건너던 마을 앞의 강은 작은 수로처럼 되어 억새가 키를 덮게 자랐다.
저 강에서 남도네 배를 타고 놀다가 남도가 미는 바람에 강물에 빠져서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버려진 논들, 논이었던 곳에 드넓게 자리한 어느집 마당, 내 동창이 살던 집은 아예 허물어져 자취도 없었고 소담하게 마을을 이루던 곳엔 허물어진 집터가 을씨년스러웠다.
가슴이 싸하게 쓰렸다.
연작으로 쓰던 <돌말이야기>의 무대는 바로 이곳이다.
우리 마을은 돌모루라고 불리웠다. 돌말은 돌모루마을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다.
어리숙한 박봉찬씨가 살았고 암담한 청춘 철만이가 은숙이를 사랑하며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던 동네다.
저기 어디쯤일텐데.. 나는 흔적을 잃은 추억을 떠올리며 자꾸 발걸음이 더뎌졌다.

어렸을때 다니던 교회다.
마을 들머리에 있어서 우리 마을로 들어가는 시작이기도 했는데 교회의 모습도 달라졌고 교회 아래 살던 선숙이네도 흔적도 없이 지워져있었다.
목사님 사택도 달라진 것 같고, 교회로 올라가던 언덕은 새로 단장해서 말끔한데 담이 없다.
"예수님은 생명의 참 포도나무, 아버지는 포도원 농부시리니 아이들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낌없이 찍어서 던지시리라"
나도 모르게 입에서 먼저 흘러나와버리는 어렸을때 배운 복음성가.
교회마당에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기웃대고 있는데 마당으로 차가 한 대 들어선다.
"누구세요?"
" 어렸을때 이 교회를 다녔었는데 오랫만에 보니 반가워서요."
" 아 그러시구나. 들어가보세요. 많이 달라졌겠네요."
목사님이셨나보다. 문이 열려있을 거라고 손짓을 하며 웃으신다.

반가워서 얼른 들어가보았다.
많이 달라지긴 했다. 목사님 사택도 달라진 것 같고, 교회로 올라가던 언덕은 새로 단장해서 말끔한데 담이 없다.
아버지가 벽돌을 올리시고 엄마가 나를 안고 다니시던 교회다.
오래 예배를 땡땡이했던 지라 잠깐 기도를 드리면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친구는 일요일인데 왜 이렇게 교회가 조용하냐고 묻지만, 요즘 교회는 저녁예배를 미리 드리는 곳이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시골에선 한참 바쁜 추수기에 예배참석이 쉬운 일은 아니다.
농촌이 점점 비어가고 있으니 아마도 저 의자가 자리를 다 채우기는 어려을 것이다.

동네에 들어서는 마음이 심란하기만 할 뿐이어서 그대로 지나쳐서 중학교로 가보았다.
중학교 역시 교정이 많이 변했다. 더 쓸쓸하고 황량하다.
아이들이 몇 남지 않은데다 대부분은 읍내로 학교를 다닌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빈교실이 더 많단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던 잎 넓은 포플러나무들이 모두 베어지고 화단에 가득하던 목련, 박태기나무도 한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그 포플러잎이 떨어지는 가을에는 운동장청소 당번이 참 괴로왔다.
가깝게는 석동리, 정암리에서부터, 멀게는 원문리, 장하리, 지토리 아이들까지 면내의 아이들이 다 오던 곳이다.
그때 우리는 참 힘들게도 학교를 다녔다.
지금처럼 뻥뻥 뚫린 큰 길도 아니고, 꼬불꼬불한 수로와 농로사이를 무작정 걷거나 좀 더 먼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주 먼 장하리, 지토리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했는데 차시간이 뜸했던지라 수업이 늦게 끝날라치면 그 동네 아이들은 불안해서 조바심을 냈다.
어느 해인가, 눈이 엄청 내린 겨울. 지토리 아이들이 아침 수업 두시간째가 끝나도록 오지 않았다.
집에서는 분명히 아침 일찍 아이들이 갔다는데, 교무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토리는 산이 깊은 마을이다.
거기다 눈이 무릎이 빠지도록 왔다는데 아무리 익숙한 길이라 해도 아이들 아닌가.
그 친구들은 오전수업이 다 끝날 즈음에야 도착했다.
눈을 다 뒤집어쓰고 허벅지까지 눈딱지를 잔뜩 붙이고서 나타난 아이들을 안고 선생님이 우셨다.
지금 같으면 참...
그때는 다 그렇게 한 시간이 걸리던 두 시간이 걸리던 학교는 기어이 가야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가 데려다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는 것이었다.

3학년때 우리반 교실이었던 곳이다.
쉬는 시간마다 해바라기를 하며 재잘대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일렁인다.

이 둑길이 이렇게 변했다니...
버드나무만 심란하게 머리를 날리고 있지만 이 둑길은 원래 플라타너스가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꿈을 아느냐 네가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새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김현승의 시를 저절로 떠올리게 되는 아름다운 가로수였다.
점심시간마다 나는 이 둑에 앉아서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코가 매운11월 이른 아침, 플라타너스 기둥마다 걸리는 안개가 좋아서 나는 아침 일찍 학교에 오곤 했다.
어렴풋한 안개가 천천히 빠지는 아침, 간밤 이슬에 젖은 나뭇잎이 아침햇살에 반짝였다.
로마, 우리들의 로마...
ㅇ, ㅎ, 그리고 나. 우리가 앉았던 나무 그늘. 우리가 로마라 부르던 그 나무도 베어진지 오래인지 흔적도 없었다.
ㅇ은 이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내 사춘기는 그렇게 혹독하게 여기에 나를 묶었다.
오래 못 찾은 고향에 미안하고 아프다.
이렇게 변할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마을 안 길로 오가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미쳐 거두지 못한 논에서 벼가 누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저 둑길 어디쯤에서 멍석딸기가 제일 많이 열리는지, 내가 아톰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맨 처음의 기도를 올리던 모퉁이가 어디인지 아직도 생생한데.
자꾸 잊혀지고 변해가는 고향이 진짜 미안한 것은 내가 만든 또 하나의 마을 돌말식구들이었다.
그들은 저쪽 담 어디에서들 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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