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룹명/풍죽도 그림 이야기

21. 융릉

by 소금눈물 2011. 11. 11.

 

09/28/2011 08:17 pm공개조회수 0 0



 



왕조 사상 가장 서럽고 슬픈 왕자, 다음 보위를 이어갈 세자로 불과 세살 나이에 책봉되고도 끝내 아버지의 손에 목숨을 잃은 비운의 사람, 사도세자의 능입니다.

비운에 돌아가신 사도세자를 평생 그리워하며 아파했던 아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즉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세자라 추상하며, 묻힌 수은묘도 영우원으로 격상시키고즉위 13년 후 드디어 이곳으로 천장하여현륭원으로 원호를 바꿉니다.
정조대왕은이 후매년 현륭원을 참배하며 못다 한 사모의 정을 바치고, 원행 길에 만나는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며 당신의나라를 이곳을 중심으로 꽃피우려 했지요.
장헌세자는 1899년 장종으로 추대되면서 묘호가 융릉으로 올려집니다.
(말씀드렸다 시피, "능"은 임금이나,왕비, 황제나 황후가 묻힌 곳이며, "원"은 그에 버금가는 인물의 무덤, 다음이 "묘" 입니다.)

1000년에 다시 없다는 명당 중의 명당, 그 자신이 풍수에 뛰어났던 정조대왕은 당신이 직접 고른 이 길지에 아버지를 모십니다. 평생 비단옷을 즐겨하지 아니하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은 정조였지만 아버지의 이 잠자리만은 최선을 다하여 지극정성으로 꾸며가능한 한 가장 화려하게 꾸몄습니다.또한 현륭원으로 가는 연로(輦路)의 지명을 황교(皇橋), 대황교(大皇橋) 등으로 바꾸었습니다. 화성을 당신의 새 나라의 수도로 삼고 싶으셨던 정조대왕은 이 마음을 화성 곳곳에 지명으로 심으셨는데 이 다리에도 그 뜻이 담겨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당신이 꿈꾸는 나라, 아버지가 꿈꾸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이런 지극한 효성을 가진 정조였기에 종종 정조는 현륭원 참배 시에 그 도저한 슬픔과 사모의 정을 참을 수 없어, 사초(沙草)를 부여잡고 지나치게 울부짖으며 가슴치기를 오랫동안 하여 격기와 구토의 증세를 보이는가 하면,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슬픔이 지나쳐 기운과 정신을 잃기도 했구요.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연민과 그런 아비를 죽게 한 정치세력에 대한 분노, 그럼에도 그 정치를 벗어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아마도 그의 슬픔의 뿌리가 아니었을까요. 유달리 영민하고 총명했던 소년이 이 끔찍한 일을 겪고 수없이 목숨을 위협받으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성년이 되었을텐데도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놀라운 업적을 이루며 자신을 밀고 나간 길을 생각하면 정조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무서울만큼 철저하고 그만큼 또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죽게 한 할아버지와 어머니, 외가에 대한 원망과 고통.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기껏 능에 대한 치장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정조의 슬픔...아버지를 잊을 수도, 잊고 싶지도 않았던 정조는 끝내 아버지가 만든 <무예신보>를 기초로 그동안 조선에서 전해 내려오는 무예를 집대성해 만든 <무예도보통지>를 완성하기에 이르르지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용영 친위부대를 아버지의 뜻으로 육성한 뜻에는 아버지의 혼을 위로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 스스로 위대한 무인이기도 했던 정조였으니 당연히 더 심혈을 기울였겠지만요.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영조에서 사도세자로, 그리고 정조로 순탄히 이어지면서 문효세자까지 그렇게 수를 다 누리며 조선의 왕위를 이어갔더라면... 한숨만 나오는 역사입니다. ㅠㅠ

'그룹명 > 풍죽도 그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묵란도  (0) 2011.11.11
19. 묵죽도  (0) 2011.11.11
18. 화표주  (0) 2011.11.11
17. 서장대성조도  (0) 2011.11.11
16. 기다림  (0) 20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