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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31. 미인도

by 소금눈물 2011. 11. 11.

 

09/12/2011 07:05 pm공개조회수 0 0


 




교지를 받고 행장(行裝)을 꾸리려 화성으로 돌아왔다.

소식을 듣고 동보와 기형이 달려왔다.


"야 우리 사또나리 신수가 훤해지셨구나. 궐에 들어가서 선녀 같은 궁녀들을 보고 나니 제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로구나. 어때 사방이 그리 모란꽃밭 같더냐?"


"모란꽃 뿐일 거나? 온 나라 한다하는 미녀들이 다 거기 모여 있을 것을? 참말로 이 세상 같지 않을 극락일 것이야."


꿈꾸는 눈빛으로 허공을 더듬던 기형에 맞장구를 치며 동보가 부러워하였다.


"궁녀는 커녕 젊은 내관도 보지 못하고 재미없는 개유와에만 있다 옵니다."


"아니 전하의 목숨을 구해준 피 끓는 무관을 어찌 먼지 풀풀 나는 책방에만 붙들어놓다 보내시는고? 하다못해 산해진미 그득한 어주라도 내려주시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입궐하라 하시기에 다 늙은 총각 짝이라도 맞춰주실까 기대를 잔뜩 하였더니."


"허 그 분 참 몹쓸 분이로세. 목숨 구해드린 값으로 치자 하면 거나한 벼슬이라도 주시던지 아니면 신임사또 부임길에 참한 색시라도 붙여주셔야 원지에서 딴 생각 아니 하고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게 될 것을. 꽃 같은 비빈궁녀와 사시는 분이라 궁한 놈들 사정을 통 모르신다니까."


"듣자하니 천세에 다시없을 성왕이라 하시니 여색도 일 없는 분이시라네. 허니 우리 같은 종자들 속사정이야 어찌 아실 건가. 우리는 그저 바랄 게 아무 것도 없네. 죽자사자 활이나 쏘고 성벽이나 돌며 이리 살다 가는 재주밖에."


짐짓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익살을 부리는 기형 때문에 방 안에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언제 가려느냐?"


"바로 내려가라 하셨으니 날이 밝으면 떠날 것입니다. 여기에 두 분을 두고 혼자만 가려니 섭섭합니다."


"그래・・・・・・"


동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형도 웃음을 보이는데 눈끝이 슬며시 젖었다.

거친 훈련과 목숨을 거는 위기 속에서도 두 사람이 있어 내가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살았다. 훈련장 곳곳마다 내 땀과 청춘의 날들이 오롯이 남아 나를 기억하듯 이들과 더불어 보낸 시간들을 나는 훗날 어디서도 그리워할 것이다. 이제 조금 가는 길이 달라졌지만 어디서든 우리가 나라를 생각하고 충성을 다하며 서로를 향해 굳은 우정을 나누던 이 장용영을 잊지 못하리라.


"그 아이는・・・・・・ 보지 않고 그냥 가려느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보고 가거라. 사람의 도리가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 둘이 어떤 인연인지 우리야 어찌 다 짐작하겠느냐만 너를 생각하는 그 아이 맘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안다."


"나라의 영이 지엄한데 교지를 받고 부임하는 길에 어찌 사사로이・・・・・・"


"허 참 답답한 놈! 누가 너에게 노류장화 기생에게 회포 풀러 다녀오라는 것이냐? 기녀라 하여 진정이 없겠느냐? 이제 화성을 떠나면 그 아이가 네가 여길 찾아오지 않는 한 너를 어찌 보러 갈 수 있겠느냐. 네 놈이 또 그렇게 살뜰한 놈이 못된다는 걸 안다. 우리야 수틀리면 말 달려 네게 쫓아가 술을 마시든 멱살을 잡든 하겠지만 그 아이야 너를 보내놓고 어쩌면 평생 눈물바람만 하다 질 꽃인데 네가 그 아이에게 한이 되려고 그러는 것이야?"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움켜쥘 듯 성화를 부리는 기형 때문에 못이기는 척 나는 일어섰다.

다시 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병방도 모른 척 하실 거라고 두 사람이 떠미는 바람에 영문을 나서기는 했는데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칼을 맞고 생사가 오가는 중에 근적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도 모른 척 했다. 동보가 옆구리를 찌르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을 잘라버렸었다.


하지만 의금부를 다녀오고 나니 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을 내가 어찌 만들었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나를 어찌 보실 것인가. 누이는, 운정은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


형제 같은 동보와 기형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답답하고 괴로운 심사였다. 근적이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근적이는 무어라 말할까. 그 아이도 나를 비난할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춘당루 문을 들어서니 종복이 달려와 등불을 올려보다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 보고 얼굴이 익은, 얼굴에 콩점을 단 노복이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나 몸짓이 영 꾸물꾸물한 것이 석연찮았다.


"몸이 아파 벌써 며칠을 자리보전 하고 누워있사온데 나으리를 모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디가 안 좋은 겐가?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병이 깊은 것인가?"


나 때문에 병이 들었나 가슴이 덜컥하여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며칠째 찾는 손님도 마다하고 저리 두문불출인데 영 행색이 말이 아니어서. 별당에 말을 전해보기는 하겠으나 몸을 추스린 연후에 다시 찾으시는 것이 어떠실지・・・・・・"


말끝을 흐리는 것이 이만 가라는 소리였다.

등 떠밀려 온 푼수이긴 하나 막상 되돌아가려니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보나 싶어 또 가슴이 막막하였다.


"찾아오신 손님을 문 앞에 세워놓고 무슨 말이 그리 많으시오!"


날선 소리에 놀라 고개를 보니 종복의 뒤에 근적이 서 있었다.

누군가 내가 왔다는 소리에 별당에 먼저 달려가 알린 모양이었다.


무색해진 종복이 물러섰다.

이전의 화려한 행색의 근적이 아니었다. 비단옷을 다 벗어두고 조촐한 옷차림에 가채도 얹지 않아 병중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알게 했다.


잡아놓고도 막상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휘적휘적 별당 쪽으로 가버린다.

나는 얼른 근적의 뒤를 따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뒷모습이 매몰차다. 한기가 서릴 듯 차디찬 기운이었다. 빈말 인사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은 어깨만 보며 하릴없이 별당 안으로 들어섰다.


호사스런 화초장이며 팔곡매란병이며 방 안에 떠도는 분내는 여전한데 고개를 외로 꼬고 앉은 근적은 춘당루 일패기생 추연의 모습이 아니었다. 흰 저고리에 수박색 치마를 입고 비스듬히 돌아앉은 근적의 모습은 여염집 아낙의 모습이었다.


많이 야위었다. 백옥잠, 연봉뒤꽂이를 꽂은 쪽머리 아래 드러난 목덜미가 옥잠보다 하얘서 차라리 서글프게 보였다.


"많이 아픈 것이냐? 몸이 그리 상하도록 무엇을 하였어?"


"나으리께서 어찌 저 같은 천한 기생에게 그런 관심을 보이십니까? 천하에 없는 나라의 동량이시니 이런 천기(賤妓)에게 베푸시는 관심이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많이 원망하였구나. 섭섭하고 분하였구나.

금방이라도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 파르르 떨리는 근적의 말에 나는 더 할 말을 잃었다.


원망을 들어도 하는 수 없다.

무엇이 그리 고고하다고 내 마음만 생각하고 내 처지만 돌보느라 한번도 저 아이를 돌아볼 염이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붙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우는 손길을 느꼈지만 애써 저 아이가 아니라 부정하였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 한 구석에서 운정 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근적이를 모른 척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누이는 아니다. 혼인을 하고 이제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된 사람을 내가 이리 부정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다. 결단코 누이를 생각해서 다른 이를 막아냈던 것이 아니다.


"미안하다. 내가 모질고 무심하였다."


진심이었다.

누가 뭐래든, 너는 내겐 춘당루 일패기생 추연이 아니라 근적이일 뿐이라고, 내 어린 날 동무이며 누이인 그 아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말에 저 아이는 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리 하여도 저리 생각하여도 말주변도 없이 죄 없는 아이를 다치게 할 것이 뻔하여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문살에 어리는 촛불 그림자만 하릴없이 눈으로 쫓았다.


딱딱하게 굳은 근적의 어깨가 도무지 풀릴 기색이 없었다.

나는 떠듬떠듬 완강한 근적의 어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공주로 내려간다. 아마도・・・・・・ 다시는 화성이며 한양 근처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내 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 들렀다."


일순간 근적의 고개가 확 들려졌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함뿍 고여 흔들리고 있었다.




* 그림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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