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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33. 신서란

by 소금눈물 2011. 11. 11.

 

09/18/2011 08:29 pm공개조회수 0 0

 

 

 


조정에 올릴 진상물목 장계 때문에 늦은 퇴청을 하는데 이방이 한양에서 오신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 전했다.

사랑으로 들어서니 뜻밖에도 기형이 와 있다.


"형님!"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석 잡았다. 얼굴에 선연하게 지나가는 칼자국이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편안해보였다.


"어찌 연통도 없이 오셨습니까?"


"강진에 가는 길이다. 동보가 지난달에 동지사로 연경에 다녀오면서 귀한 옹방강 비첩(碑帖)을 구했다 하기에 바람도 쏘일 겸 네 얼굴을 보고 가고 싶어서 바쁜 나리 대신 심부름을 자청했다."


"다산영감을 뵈러 가는 길이군요. 헌데 동보형님이 어찌 그 분과 어떤 인연이시길래・・・・・・"


"동보가 광주사람이니 그 댁 일가들과 어려서 먼발치서 안면이 있었던가보더라.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곁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피바람 속에 져버렸으니 그 분도 유배지에서 찾아올 사람 하나 없이 적적하고 고단하게 지내실 터. 더구나 골동에 미쳤던 분이니 이 아니 반가워하시겠느냐."


"동보형님은 여전하십니까?"


"화성 만호보다는 백배는 나은 자리지. 이 꼴 저 꼴 안 보고 바깥세상으로 돌아다니며 서양의 신학문도 접하고 아무래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틀어박혀 밥그릇 싸움질이나 일삼는 꼴도 안 보고 얼마나 좋을 것이냐?"

내가 공주로 내려간 후 역모의 뿌리를 잡은 기형은 그 공을 인정받아 화성 만호로 임명되었다. 무술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높은 데다 큰 공을 세웠으니 궁으로 불러들이려 하셨으나 장용위가 궁에까지 들어오는 것을 조정에서 반대하였다. 이미 전하의 곁에는 뛰어난 무장들이 차고 넘치며 전하의 지근거리보다는 장용영에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논리였다.


"화성은 내탕금을 내려 재원으로 삼고 스스로 자급자족하여 이용후생의 모범이 되게 할 곳이니 내 탕목읍(湯沐邑. 중국 주나라 때 천자가 목욕비를 충당하기 위해 내려준 직할통치지역)이나 다름없다. 요역과 각종 세를 면제하고 수리와 둔전을 이미 설치하여 소출이 좋으니 내 백성들이 과연 살만 한 곳이다. 내 아버지와 나의 꿈이 이뤄지는 곳이니 각별히 수고를 더하여 백성을 살피라."


그러나 훈련장에서 몸이 익은 기형에게 장용영을 떠난 벼슬이란 불편하고 고단한 일일 뿐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답답해 죽겠다고, 전해오는 서신마다 우는 소리였다.


전하께서 승하하실 때까지 축성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나라에서 하는 공역에 당연히 신역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고된 일이었는데 품삯을 내리고 철에 따라 의복과 약이 지급된다 하니 구름같이 인부들이 모여들었다.


"민심을 즐겁게 하고 민력을 가볍게 하는 일에 힘쓰라. 한 가지 명령이라도 민지(民志)를 꺾을까 염려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민력(民力)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라・・・・・・ 말씀은 좋지. 더 없이 높은 용상에서 그리 굽어보시나 현장의 관리들에겐 죽을 지경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새벽부터 한 밤까지 숨 쉴 틈도 없이 화성을 돌아다녔다. 그렇다고 불평하자니 이미 그 분이 그런 분이라 한양의 한다하는 신료나 성균관 각신들도 그리 죽자 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 터에 한가한 소리 한다 목이 달아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건 칼 들고 뛰어다니던 것 보다 조금도 편하지 않았으니 공이고 뭐고 고생만 작신 했다."


"그래도・・・・・・ 그 때가 참 좋았습니다."


기형이 한숨을 쉬며 끄덕끄덕했다.


"그렇지・・・・・・ 승하하시고 벌써 삼 년, 세상이 이리 변할 줄 어찌 알았겠느냐. 세상인심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세월이 야속한 것인가 권력이 그리 무서운 것인가・・・・・・"


마지막, 개유와에서 뵙던 전하의 용안이 떠올랐다. 끝도 없는 싸움에 지치고 외로우셨던 왕. 그는 그 싸움에서 져버린 것일까. 승하하자마자 그 몸이 식기도 전에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고 전하의 신하들은 하루아침에 모조리 목숨을 잃고 파직을 당했다.


"높으신 임금 홀연히 떠나버리자

요원의 불길처럼 화란이 타올라서

붉은 옷 죄수들이 길을 메울 지경에

목과 손과 발에 씌운 형틀에서

목숨을 잃었다오.


다산영감의 피 끓는 탄식 그대로지 않더냐."


"병방께서도・・・・・・"


"누군들 살아남겠느냐. 장용영이 통째로 갈가리 찢어져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날아가버렸는데. 네가 전하 곁에 붙어있었다면 넌 들 무사했겠느냐? 황장목 아니라도 그 곁에 붙어사는 애송(松)이라도 쓸어내버리는 판국에. 어찌 생각하면 너를 이리 멀리 보내신 전하의 성심 덕분에 네가 그 난리통 속에서 무사했는지도 모른다."


서늘하고 냉정한 얼굴이지만 가장 어린 병사들의 부상도 일일이 챙기던 병방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있어서 좋은 시절이었다.


"그렇지요・・・・・・"


"공주 현감 노릇은 그래 할 만 하더냐?"


무거워진 방 안 공기를 덜기 위한 듯 기형이 말머리를 돌렸다.


"어렵습니다. 날마다 조정에서 내리는 과한 세금과 노역 때문에 안 그래도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시달리는 백성의 살림이 나날이 어려워지니 수령으로 답답하고 괴로울 뿐입니다. 군포라도 줄여달라고 조정에 숱하게 장계를 올려도 소용이 없고・・・・・・"


"언제 그 놈들이 백성의 살림살이를 걱정하고 살았다더냐? 피땀 흘려 올리는 진상품도 중간에서 중신들이며 그 아랫것들이 죄다 빼먹고 정작 나라창고에 쌓이는 것도 별 반 없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소리지. 그나저나, 공주에서 올라온 장정들이 무과에서 아주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지? 소식을 듣고 내가 다 뿌듯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무과를 보면 뭘 한답니까. 과장에 들어가도 어차피 급제하지도 못하는 것을요. 한다하는 양반 가문이 다 먼저 점을 찍고 급제자를 정해놓고 시작하는 과거가 무슨 소용이랍니까. 되지도 않을 일에 헛된 꿈만 키웠다 고생만 더 하게 한 건 아닌지 뼈가 시립니다."


"활터에서 임금을 만나 무과를 보던 때는 이미 지나가버렸지. 그런 세월이 다시 올까・・・・・・ 온 나라에서 장용영 무과를 치르겠다고 구름같이 인재들이 모여들던 그 때가 사무치게 그립구나."


웃자고 꺼낸 말끝에 다시 마음이 돌덩이를 인 듯 답답해졌다.


"허나 이 나라가 어찌 이 모양대로만 흐르겠느냐? 언젠가는 대왕대비도, 노론도 다 끝날 날이 오지 않겠느냐? 금상께서 대리청정을 마치고 직접 나설 연치가 되시면 그때는 나아지겠지. 그 때를 위해서도 어디서든 인물은 키워야 하고, 그게 우리 일이다."


"그리 되겠지요? 정녕 그런 날이 오겠지요?"


"암. 그리 되다마다."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고 나날이 어두운 풍문뿐이나 우리는 그런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지난날들이 꿈만 같아서, 그런 날을 다시 다음 아이들에게라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리 희망을 잡고 싶었는지도.


"아 참, 실은 네게 알려줄 소식이 있어 들른 것인데 하마터면 제일 반가울 소식을 잊고 갈 뻔 했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윤헌의 누이 소식을 들었느냐?"


"예? 운정 누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바싹 당겨 앉으며 흥분한 내 얼굴을 보고 기형이 빙그레 웃었다.


"이 답답한 인사를 보았나. 이리 숨이 넘어갈 것을 여태 찾지도 않고 버텼단 말이냐?"

"살아 있습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화성에 있다. 그것도 내 관아에."


"예?"


만호에 부임하면서 함께 관비로 왔는데 한동안은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단다. 익지 않은 일이라 정신없이 공무에 매달려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도무지 험한 관노의 얼굴이 아닌 해사한 젊은 여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었다.


"생각하면 전하의 뜻이었던 게다. 관기를 만들지는 말라고 따로 언질을 받았기는 했지만 그이가 죽은 장수현의 내자였던 것은 몰랐다. 지방으로 내몰린 역모집안의 식솔이 어찌 되든 그거야 거기 수령들 마음이 아니겠느냐. 사도세자 익위사의 손녀인 것을 아시고 다른 곳이 아닌 화성 내 밑으로 보내신 게지. 죄가 엄중하여 그 남편 된 이가 참수되었으니 가족이라고 어찌 그냥 두겠느냐. 그래도 전하께서 따로 마음을 쓰셔서 이 사람만은 거두신 것 같으이."


누이를 향한 기형의 말투에 온기가 배인 것을 나는 눈치챘다.


"어찌 지냅니까? 무탈하지요?"


"무탈하다마다. 작년에 그 때 일이 다시 거론되면서 죄인들은 이미 죽어 그 죄를 다 물었으니 그 가족들은 면천하여 그 신분을 복권시키라는 명이 내려졌다. 허나 이미 그 시가도 친가도 몰살이 된 터에 어디로 가겠느냐? 너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내가 사사로이 따로 작은 집을 내어 머물고 있다. 어떠냐 한번 만나야지 않겠느냐?"


가슴이 떨렸다. 그 날 이후로 밤마다 잠을 못 이루며 누이의 원망과 눈물을 생각해온 나로서는 다시없는 기쁨이었고 고마움이었다. 관기도, 관비도 아니고 그저 면천되어 무사하다는 말만으로도 나는 평생의 짐을 다 던 마음이었다.


"누이에게 제 얘기를 했습니까?"


"같이 내려가자 하였더니 도리질을 하더군."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역시・・・・・・ 제가 용서가 안 되시겠지요."


"그게 아니라, 자신을 본들 네 마음이 편하겠느냐고, 네게 가 네 아픔만 더할 것이 분명하니 훗날 마음이 더 가라앉고 평안해지면 그때 다시 보자 하더구나. 끝까지 네 얘기였다. 너를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예・・・・・・"


"춘당루 추연이 아니라 그이가 네 정인이었던 것이냐?"


"형님!"


기형이 껄껄 웃었다.


"네 얘길 하면서 하도 사연이 곡진한 표정을 하기에 혼자 생각을 했던 게지. 혹 그렇다면 전에는 누이라 아니 되었겠으나 이제는 그런 처지도 아니고, 어찌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신원이 복권되었으니 누가 뭐랄 것도 아니고 한양도 아닌 이런 시골에서 누가 알 것도 아니고."


"그런 인연이 아닙니다."


허나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 누이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로만으로도 나는 감격하였다.


"한 세상 살면서 내 마음을 억지로 잡고 이기느라 못하면서 북망 넘어가는 일 만큼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내 상처한지 오래도록 혼자이다 보니 그나마 총각현감으로 늙어가는 네 꼬라지가 남 일 같지 않아 그런다. 이제 어지간하면 혼례도 올리고 너도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므나."


"그리 마음 쓰이시면 형님부터 장가를 드시던지요. 아니면 형님 말씀대로 누이가 맘에 드신다면 잡아보시던지요."


"안 그래도 실없는 소릴 했다가 혼찌검이 났다. 그나마 승하하신 선왕의 사람 붙이라고 관아에서도 오늘 내일로 쫓겨날 판에 같이 갈까 하여 은근슬쩍 운을 띄웠더니 오래 전에 마음을 묶어 보낸 끈이 있으니 다시 그 마음이 돋아날 리 있겠냐고 핀잔만 들었다."


껄껄 웃는 소리가 빈 웃음 같지가 않았다.

마음을 묶어 보낸 끈. 수현이 아니었다.

누이는 아직도 그 까마득한 옛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구나. 가슴이 멍이 들은 것처럼 아려왔다.


어리석고 한심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들으면서 위안이 되는 것을 느꼈다. 누이가 나와의 풋정을 잊지 않고 새겨왔다는 것이 이렇게 마음을 위로해주는 지, 그이가 겪은 맘고생은 생각도 않고 내 생각만으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네 놈이 떠밀었다면서 돌아가면 다시 한번 집적거려 볼까나?"


"형님이시라면 저도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누이를 잘 부탁합니다."


"후회하지 말거라."


"그리하지 않도록 얼른 가 보십시오."


이제야 마음이 편해진 나도 기형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있었다.

그래. 지금은 아니어도 괜찮다. 누이가 그런 마음이었다면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누이를 보지 않아도 괜찮다. 잘 살아주기만, 어디서든 좋은 짝과 잘 살아주기만 하면 나는 괜찮다. 기형의 손을 잡고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행여 누이 마음을 엇짚을까 싶어 못 하였다. 행여 기형의 마음이 진정이라면 누구보다 잘 어울릴 두 사람을 위해서도 이만큼 물러서 주는 게 나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강진으로 떠나는 기형의 짐에 나는 종이와 책 몇 권을 더 얹어 보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 분이 필요하실 것이었다.


그 날 밤 꿈에 나는 그 마당에 서 있었다.

은행빛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댕기를 묶은 누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누이가 내 찢어진 속적삼을 바라보았다. 누이가 다가와 가만히 내 옷깃을 만졌다. 누이가 만진 찢어진 옷깃이 새 살처럼 여물었다. 나는 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날 이후로 밤마다 아프던 어깨가 그 밤은 아프지 않았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깊고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



* 그림 강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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