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온 몸이 타들어갔다. 손가락 끝까지 바위가 매달린 듯 했고 천근만근 눈꺼풀이 무거워 뜰 수가 없었다. 먹먹한 의식 사이로 잠깐 흐릿하게 귀가 열리면 걱정 섞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열에 들뜬 이마를 누군가 만졌던 것도 같다. 아 할아버지・・・・・・ 구선복의 일가붙이에게 뭇매를 맞고 혼절했던 날, 밤새 내 머리맡을 지키던 할아버지의 따뜻했던 그 손처럼 가만가만 이마를 쓸어주던 손길. 누구였을까. 나도 모르게 신음하며 뒤척일 때 황급히 내 어깨를 붙안아주며 잠깐 내 얼굴에 누군가의 눈물이 닿았던 것도 같고・・・・・・ 모르겠다. 흐릿한 불빛 속에서 아득한 기억 저 편의 사람들이 스쳐갔다. 다시 보지 못한 외숙부의 창백한 얼굴도, 할아버지도, 볼우물을 옴팍 패이며 까르르 웃던 운정누이도, 초어정 사람들도・・・・・・ 그리고 맨 마지막은 언제나 고개를 떨구며 내 가슴에 쓰러지던 기형의 얼굴. 살아있는 것일까, 나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눈앞은 캄캄하고 아무 것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귓가에 윙윙거리던 흐릿한 말소리들, 내 적삼을 들치고 상처를 닦는 차가운 손길・・・・・・ 누구의 것이었을까・・・・・・ 길고도 긴 잠이었다. 진저리를 치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누군가가 등불을 쳐들며 다가왔다. "정신이 드는 게냐? 창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갈라져 터진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 이제 되었다. 살았구나 창아." 물에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는 손길을 나는 기억해냈다. 동보였다. "기・・・・・・형 형님・・・・・・은?" "괜찮다. 쉽게 죽을 놈이 아니다. 여기저기 꼴이 말이 아니긴 하지만 사나흘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고 설치고 다닐 것이니 그 자식은 염려 말아라." 살았구나・・・・・・ 메마른 목구멍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다시 수렁 같은 어둠 속으로 잦아들어갔다.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동창이 조금씩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벽에 기대 잠이 들어있던 누군가 내가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내 옆에서 쪼그리고 누운 몸을 부산히 흔들었다. "어이 동보! 창이 깨어났다. 그만 좀 쳐 자라!" "어, 어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다가와 내 눈꺼풀을 열었다. "괜찮아졌네. 핏기도 많이 빠졌고." "형님・・・・・・" 기형과 동보였다. 기형은 얼굴이 퉁퉁 부은데다 왼쪽 눈 아래부터 입가까지 험하게 그어간 상처가 아직도 완연했다. "무사하셨군요・・・・・・" "북망산 넘어가려다보니 추연이 치맛고름도 한 번 못 풀어보고 죽는 게 억울하더라. 너만 사내란 말이냐? 열이 나서 도저히 그대로는 못 죽겠더라. 네 놈이 죽으면 내가 추연이 서방노릇 하려고 했지." "어이구 이 화상. 입만 살아 동동 떴지 사대육신이 다 부서진 놈이." 동보가 기형의 이마를 쥐어박으니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어찌 되었습니까?" "어찌되고 말고가 뭐 있겠니. 엄청난 사건이었지." 동보가 머리를 흔들었다. "권세 가진 사람들이 궁궐 안에서 뭘 생각하고 사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냐만 듣자하니 종실과 우상까지 얽힌 엄청난 역모였다는구나. 우리가 잡은 것은 기실 그 끄트머리 쥐새끼였을 뿐이고." "제가 며칠이나 이리하고 있었습니까? 전하는 무사하셨지요?" "전하는 무사하시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셨으니 염려할 것 없다. 혹시라도 옥체가 상하셨으면 우리가 지금 이리하고 있겠느냐?" 기형이 하하 웃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걸려서였다. "네가 정신이라도 든 것이 꼬박 사흘만이다. 간도 크게 전하를 향해 편전을 날렸으니 살기를 바랐겠느냐. 내금위 그 놈이 네 화살을 맞고 즉사하면서 전하께서 바로 내금위와 겸사복들을 멈추지 않으셨으면 너는 지금 염라대왕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야. 화양루에서 사단을 지켜본 아이들 하는 말로는 순식간에 네 몸을 도륙하는데 손속이 어찌나 빠르고 매운지 그야말로 손끝이 보이질 않았다더구나." 눈을 감았다. 이제 되었다. 전하께서 무사하시면 그걸로 되었다. "환궁은 무사히 마치셨답니까?" "잘 끝났단다. 나도 너와 기형이한테 붙잡혀서 영을 나가보지 못하고, 기형이나 너나 이 꼴이라 그 좋은 구경 다 마치지도 못했지만 원행이야 뭐 수시로 나오시니. 이제 네 몸만 추스르면 된다." "그런데 기형 형님은 어찌 화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셨습니까?" 기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그 자를 처음 본 곳이 사정(射亭 활터)이었다. 기억나지 않느냐? 내 무과를 치르기 전에 하고한 날을 활터에서 살았지. 내 너를 처음 만난 곳도 게서가 아니냐? 아 생각해보니 미행을 나오신 전하를 만난 것도 거기니 어찌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인연들이 게서 얽혔구나. 밥그릇 축낸다고 눈치만 먹으며 하릴없이 놀러 다녔는데 노는 것도 다 터를 잘 잡아야 출세길이 펴지는 법이야." "암튼 사내놈이 수다는・・・・・・네 사설 듣느라 없는 손자 수염 나겠다 이놈아." 동보가 체머리를 흔들었다. "활터에서 아주 소문난 왈자였던 모양이더라. 딱 한 번 본적이 있었지. 그 자가 활을 들고 으스대면서 등장하면 한량들이 알아서 저절로 사대(射臺)를 비켰다. 호랑이 잡는 착호군이라는데 조총에도 능숙하고 성격이 포악해서 누구도 함부로 앞을 막지를 못했다. 날마다 북촌 근처를 어른거리면서 어찌어찌 높으신 양반의 눈에 들었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던지 금원에까지 들어가 사냥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한다 했다." 사냥은 커녕 얼씬만 하여도 목이 달아날 금원에 간도 크게 들어가 사냥을 하였다니 대단한 작자였다. "그런 놈이 어찌 장용영 화병이 되었을꼬? 그런 작자 심사에는 장용위가 되어서 뭘 대단하게 방귀뀌며 살겠다고?" "그러니 화병이 아니었던 게지. 기실 그가 화병이라고 짐작한 것은 우리끼리의 착각일 뿐 그놈 입으로 들은 말도 아니었지 않느냐? 새벽에 병방 막사에 물동이를 들고 어른거리니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이지. 얼핏 스쳐갈 때는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기만 했지. 몇 년 전에 딱 한 번 활터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워낙 요란하게 굴어서 기억에 남았던가 보다.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뭐 장용영 안에서도 이름을 다 모르게 부딪치는 얼굴이 수다하니 그 중 하나로 생각했지. 딱 기억이 난 것은 그 냇가에서 물을 먹겠다고 엎드렸을 때다." 어깨가 아파오는지 찡그리자 침을 삼키며 듣던 동보가 얼른 다가가 환부를 살폈다. "동보 이 놈이 물바가지를 받아들었을 때 말이다. 조적등에 그 놈 머리통이 잠깐 비춰졌는데 관자가 외점박이 대모관자더란 말이지." "허・・・・・・!" 별감이었다는 말이구나. "대모관자라면 보통 한량이나 병졸이라면 평생 구경도 못하고 말로만 듣던 것이 아니냐? 그 자가 장용위가 아니라 어지간히 기세 좋은 한양 별감이라는 소리지. 그런 놈이 새벽에 어슬렁거리며 물동이를 지고 나르니 병방의 상태를 염탐하려던 간자(間者 첩자)가 틀림없지. 그게 그 순간에 퍼뜩 뇌리를 스쳐가더란 말이지." "그 자들로 보아선 병방에게 부상을 입히고 장용위 최고 궁수인 너를 떼어놓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돌 하나를 던져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었겠군." "칼을 든 것은 그 놈과 전하 곁의 내금위였고 기실 올라가자면 이자들을 손으로 쓴 놈들이 있지. 정5품 전훈(典訓) 장수현 따위가 끝이 아닐 것이다." "예?" 역시 수현이 그들 무리였구나. 지금쯤 수현은 어찌 되었을까. 하기야 생각해보나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전모가 다 발각이 되었다면 보나마나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을 것이다. "너는 몸도 온전치 않은 녀석이 뭘 그리 꼬치꼬치 알려드느냐. 푹 좀 쉬고 몸을 먼저 추스르거라. 기실 기형이 이 놈도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 이리 오래 앉아있으면 아니 된다." 그러고 보니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도 힘들만큼 피로했다. 다시 가뭇가뭇 잠 속으로 빨려드는 내 귓가로 동보의 말이 따라왔다. "추연이 왔었다. 영이 지엄하나 네가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나 보자고 사정을 하여 잠깐 은밀히 들였다. 사람 꼴이 아닌 너를 보고 많이 울다 갔다." 근적이 왔었구나. 그 따뜻했던 손은 그럼 근적이였을까. 내 볼에 묻어오던 물기도. 다시 보지 말자 하였는데 왜 왔더란 말이냐. 무어라 중얼거리는 동보의 말이 끝내 다 잡히지 않았다.
* 관자 - 망건에는 망건을 죄는 당줄이 달려있는데, 이 줄을 꿰어거는 것이 관자이다. 신분에 따라 재료가 다른데 보통관원이라면 옥관자, 정3품 당상관이 되면 금관자를, 정 2품이 되면 도리옥관자를 단다. 벼슬아치가 옥관자를 달면 나리, 금관자를 달면 영감, 도리옥관자를 달면 대감이라 부른다. 별감은 금관자, 옥관자도 아닌 대모관자를 달았다. '대모'는 누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바닷거북의 등짝지로, 안경테, 담뱃값, 갓끈, 장도, 풍잠 등 장신구나 생활용품의 재료로 사용되는 고급 재료이다. 외점박이 대모관자란 검은 점이 하나 강조되어 있는 대모로 만든 관자로, 특히 더 고급품이다. 별감은 옥관자, 금관자를 달 일이 없었으므로 대모로 만든 관자로 사치를 했던 것이다.( 출처 강명관 지음 <조선시대 뒷골목 풍경>)
* 그림- 이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