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등허리가 따뜻하다.
아내가 다가와 등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안았다.
나는 손을 뻗어 아내의 팔을 내 허리에 두르고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당신도 주먹 피지 말아요.
꼭 쥐고 있어요."
그녀는 내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거...아세요?
나 이미 당신 손 안에 들어 있어요.
내가 아무리 손을 활짝 펴고 있어도 나는 당신 안에 있으니까,
당신이 나를 다 덮고 있는 내 기쁨이니까
그러니까 상관없는 거에요."
나는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말갛게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천천히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말해줘요."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내 기쁨이고 내가 여기 있는 이유예요.
그러니까... 다시는 불안해 하지 말아요."
입이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자꾸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쉴 새 없이 종알대고 싸움을 걸어오고 겁도 없이 깡패들과 맞서려던 여자.
군밤을 좋아하고 내 장갑을 좋아하고 내가 곤란해지면 자기가 먼저 동동거리던 여자.
할 줄 아는 건 주먹질 뿐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끄러움도 겁도 없던 내게
그렇게 말간 눈동자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해 준 사람.
나를 선택해주기까지 그녀가 감당했을 많은 것들.
사람들의 시선, 더러운 이름,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살면서 한번도 남의 입에 부끄럽지 않았을 <윤미주> 라는 이름 석자가
<조직폭력배 하강재의 애인>으로 신문지상에 올랐던 그날
나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내가 감히 누구를 꿈꾸었던가.
죽을 힘을 다해서 내가 있던 세계를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전직깡패>일 뿐 아니라 현재로도 앞으로도 얼마든지 개가 될 놈이었다.
내가 그녀를 잊어주는 것만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옳았다.
우리의 인연은 신도에서가 마지막인 것이 가장 좋았던 일이었다.
언제나 현명했던 사람이 왜 나 같은 놈을 바라보아주었는지....
안될 일이었는데...
4년동안 나는 밤마다 그녀를 떠올렸고 밤마다 또 그녀를 지우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다.
노란 별처럼 손을 쫙 펴고 고개를 갸웃하고 내게 인사하던 모습,
머리를 붕붕 띄운 채 차를 빼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하던 모습,
껍질을 깨지 않은 밤이 펑펑 떠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내게 기울던 그 작은 얼굴,
나는 그 모습들을 지우지 못해서 밤마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크리스마스의 종이 울릴 때,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내게 고백하던 그 밤이 미치도록 그리웠고
차디찬 손을 뻗어 나를 잡던 그 감촉이 밤마다 내 손을 죄어왔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아주고 있을까.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놈에게도 손을 꼼지락거리며 웃어줄까.
그리고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내게 기울어지던 그녀의 어깨.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 속삭여주던 그날 밤의 기억.
내 가슴에 부딪던 그녀의 젖가슴,
그리고 그녀보다 더 떨리는 나를 안아 이끌어주던 그 따뜻한 손가락의 기억들...
눈을 감으면 그 손가락이 내 가슴에 얹혀왔고
내 배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꿈에서 나는 늘 그녀와 함께
그 바닷가에 서 있었고
한계령에서 마주보고 있었고
그 빌어먹을 펭귄모자를 쓰고 소원을 적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칼날이 되어 내 뇌수를 후벼팠고
잊을 수 없어서 미치도록 괴로웠다.
시간이 가면 그녀도 나를 잊을 것이었는데 나는 도저히 그래지지를 못했으므로.
그녀의 흰 종아리와 가는 목덜미, 웃어도 눈물이 자주 보이던 그녀의 미소들.
그것은 내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내들이 다 눈멀어버려지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던가.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내 가슴을 통째로 누군가 뜯어가버리기를 바랬다.
내가 죽어서야 잊을 수 있다면 그러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그래도 잊어야 했다.
그래도 보내주어야 했다.
그 바보같은 여자는 한번도 면회를 거르지 않았다.
내가 어떤 놈인지를 그렇게나 속속들이 다 알아버렸는데도 왜 그렇게 대책없이 멍청했던가.
그녀는 세상이 두렵지도 않았던가.
잘 나가는 의사로, 적당히 속물적으로,
남들과 비슷하게 그렇게만 살면 아무 문제도 없을 사람이었는데 왜 그토록 무모했던가.
그녀가 그때에 얼마나 망가져가고 있었는지를 나는 출소 후에서야 태산에게로부터 들었다.
왜 그랬던가.
나보다 왜 그녀가 더 고통스러워해야 했던가.
하나님이 왜 그녀에게 벌을 주셨던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벌을 받는 것은 나 뿐이어야 했는데
그토록 끔찍하게 고통을 겪는 것은 나 혼자로도 충분했는데
왜...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줄을 나중에야 지식인으로 알아보고
나는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까지 필요했던가.
이 땅을 떠나서 세상의 끝으로까지 가야 했던 것이 그녀가 받을 벌이었던가...
그렇다면 하나님.
제가 다 받겠습니다.
이 사람을 기어이 선택해서 불밭에 내가 다시 선다 해도
막을 수만 있다면
이후에 어떤 고통을 다시 겪더라도 그녀를 돌려세울 수만 있다면
감당하겠습니다...
아직도 나는 이 행복이 두렵다.
하늘에 계신 그 분이 마지막에 어떤 벌을 내게 주시려고
지금 이렇게 나를 보고 계신 건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 두렵다.
하지만 나는 감당할 것이다.
내게 오기 위해 그토록 먼 길을 힘겹게 와준 그녀에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게 어떤 길이든...걸어갈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성은 강가가 아니다.
내 성이 하가이든 강가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새끼... 너를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던 그 마지막 말씀으로 나는 다 받은 것이다.
내가 성을 바꾸자면 세연이의 이름을 다시한번 세상에 떠벌려야 할테고
그것은 그에게 할 짓이 못된다.
나 혼자 고통스럽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세연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나보다 적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세연이는 아직도 회사를 내가 맡아주기를 원한다.
시간만 나면 신도로 찾아와 커가는 회사의 청사진을 보여주고 결정을 할 일이 있으면 내 의견을 묻고는 한다.
그는 철저히 경영권을 임시로 맡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고맙지만 아마도 내가 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백이사님의 말씀이 맞는다.
회사는 경영주의 것이 아니라 그 회사원들의 것이다.
뒤늦게 가진 대학졸업장을 가지고 그 큰 회사를 감당할 자신도 능력도 없다.
회사의 줏가는 날마다 오르고 있고 사회기여도가 높은 곳으로 신문에 자주 나서 이미지도 아주 좋다.
전직 깡패들이 건설회사를 굴린다고 비난하던 여론도 사라진지 오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워진 학교도
아내가 가끔 재단쪽의 얼굴로 참석해보면 학교도 꽤 괜찮게 돌아가는 듯 하다.
그 정도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어차피 그 회사가 이렇게 탄탄하게 성장한데에는 나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선 안되는 것이다.
세상같은 건 우리는 그냥 잊어버리고
세상도 우리를 잊어주길 바라면서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더는 정말 바랄 것이 없다.
아니 딱 하나가 더 있긴 하다.
제발 그녀가 대책없이 뚱뚱해지고 얼굴이 빨리빨리 좀 늙어버렸으면 좋겠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아내지만 아무에게나 웃어주는 건 정말 질색이다.
세상의 사내새끼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아직도 아내는 모른다.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녀가 입을 맞추어줄때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오소소 솜털이 돋은 것을 볼 때마다
이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 안심이 되다가도
그래도 세상엔 눈이 너무 밝은 녀석이 또 있을 것만 같아 그게 두려울 뿐이다.
세연이 자식이 아직도 아내에게 딴 마음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알지만
아내가 그 놈에게 속없이 웃어주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다.
아니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철이 없는 거야.
그건 도대체 몇 살이나 먹어야 드는 거야.
어쩌자고 우편물을 갖다주는 집배원에게까지 친절해야는지 모르겠다.
돌릴 수 있는 우편물은 몽땅 이메일로 바꾸어버렸는데도
교회때문에 오는 우편물은 날마다 있다.
그런 것은 제발 한달에 한 번 몰아서 갖다주면 안되는 걸까.
창이의 기침소리가 들린다.
비를 맞고 다니더니 감기기가 있나보다.
놀이친구를 만든다고 세 살밖에 안된 녀석을 유치원에 보냈는데
돌아오면 이제 걸음마를 하는 제 동생에게 달려든다.
그렇게 유별나게 제 동생을 챙기는 녀석이 또 있을까 싶다.
영이가 울면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고 발을 구르는 녀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뜨겁다.
가족이란 이런 거였구나.
제 피붙이가 아프면 저도 이렇게 함께 아픈 거였구나.
그것을 저 세살박이 아가도 아는 것이다.
아내가 아이의 발가락을 쓰다듬다 나를 바라본다.
나도 아내를 마주본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가만히 웃어준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 말을 입에 올리기가 너무나 무겁고 커서 이제껏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나를 바라보며 웃는 그녀의 얼굴,
이렇게 아내를 보는 내 마음,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그 작은 발가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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