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소리를 들어보았니?"
라일락이 진한 향기를 뿌리는 뜨락을 내려다 보며 서 있다.
전산실 창은 뜨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굵은 쇠창살이 가로질러간 창문을 반쯤 열고 나는 백지처럼 환한 햇살을 본다.
꽃향기가 나를 불렀다.
봄볕이 부신 오후다.
눈이 부시어 내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곳에 그가 있다.
보라색 라일락 향이 자꾸 그가 있는 쪽으로 감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주차해 놓은 차를 열심히 닦고 있다.
그는 햇살 아래 있는 게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려고만 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밤에 그냥 깰 때가 있어. 나비 날개가 얼굴을 스치는 것 처럼 가만히 나를 쓰다듬는게 있잖아. 그런 기분이 드는 거. 그런 아침엔 영낙없이 목련이 한 송이씩 벌어 있는 거야. 꽃은 그렇게 펴. 밤에 혼자 가만히 움텄다 퍼지는 것처럼."
찻잔을 건네면서 동료가 하는 소리다.
나는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어느날 일시에 화악 피는 것은 벚꽃 뿐인 것 같다.
아기들이 꼭 쥐었던 주먹을 처음 펴는 것처럼 꽃도 그렇게 필 것이다.
조금 망설이면서, 조금 두려워하면서.
그러다 나는 또 빛 바랜 사진 속으로 들어간다.
인화지의 반짝거림이 오래 전에 사라진 낡고 풀기없는 스냅 사진 한 장.
버스가 시골길을 달려간다.
포장도로지만 흙먼지가 덮여 차가 한 대씩 지날 때마다 풀썩 일었던 먼지가 자욱하다.
눈 앞을 덮어 오는 것처럼 먼지가 일면 나는 눈을 감는다.
먼지, 마른 바람....
차가 휙 지나가면 길 가에 도열한 코스코스가 휘청 흔들리면서 일제히 넘어졌다가 천천히 일어난다.
꽃은 그렇게 잠깐씩 졌다가 다시 피어난다.
잠깐 지는 새에 꽃은 죽음을 겪는다.
가을 걷이가 다 끝난 들판은 스산하다.
논 둑에서 여름을 났던 허수아비 어깨가 처져 있다.
산허리에 핀 억새가 휘청거린다.
운지와 양산 통도사에 가는 날이다.
서로 직장은 달라도 셋은 같은 집에서 자취를 한다.
직장은 다르지만 고향 선배라 언니와 나는 한 방을 쓰고 운지는 오롯하게 혼자 썼다.
처음엔 생활권이 달라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한번 인사를 트고 나니 저녁식사도 곧잘 같이 하고 저의 직장동료들 보다는 언니와 나를 더 따르게 되었다.
멜빵이 달린 청바지를 입고 구슬이 발등에 조롱조롱 붙은 빨간 운동화를 신고 나온 운지는 무척 귀여웠다.
하긴 스물 서너 살에 귀엽지 않은 여자는 없다.
가끔씩 보이는 알 수 없는 그늘에도 불구하고 운지는 천성이 밝고 싹싹한 아이였다.
운지는 차에 오르자마자 내 어깨에 머리를 대고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 전날 토요일 밤 늦도록 근무를 해서 피곤하기도 할 테지만 운지는 차만 타면 어린애처럼 잠들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수학 여행을 갔을 때도 그 아름답다는 설악산 운해도 보지 못하고 내내 잠만 잤다고 웃었다.
남녘으로 온 지도 벌써 세 번째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숙이 언니와 운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또 가방을 꾸렸을 지도 모른다.
"난 가끔씩 꿈에서 이 길을 봐. 이상해. 한번도 와 본적이 없는데 분명 낯설지 않단 말이야"
어느새 잠이 깨었는지,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던 내게 운지가 말을 걸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시장을 오가다가도 문득, 아 이거 언젠가 겪은 일이야, 이런 감정 똑같이 겪었었어 하고 그럴 때 있듯이. 그런 걸 거야"
"꿈 속에서는 언제나 여름이야. 한 여름 뙤약볕에서 나 혼자 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거야. 이제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절실하게 하면서 그냥 걸어가. 한없이....."
운지는 피로한 듯 쳐진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리고는 찬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린다.
먼지 낀 유리창에 운지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삐뚤거리는 선 안으로 나른한 가을볕이 조금씩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