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왜 운지와 나는 통도사에 갈 생각을 했을까.
기억에 없다.
챗바퀴 돌아가는 듯한 일상이 지겨워서 잠깐 바람을 쏘이러 간 것이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운지와 나는 조금 쓸쓸하고도 낯익은 늦가을의 정경을 만나러 갔을 뿐이다. 운지와 나는 불교신도가 아니다.
우리가 일어설 때까지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바람이 설렁 불 때마다 흰 꽃이 하염없이 지는데 작은 암자에는 아무도 없다.
반질하게 윤이 나는 마루에 흰 고무신이 마르고 이따금 뒷뜰에서 툭,툭 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운 불일암을 나와 오솔길을 내려오다 나는 미끌어졌다.
낙엽 더미 속에 날카로운 자갈이 들어 있었던지 미끄러지면서 팔뚝에 깊은 상처를 냈다.
피부가 긁히면서 갈퀴로 긁은 것 같은 빨간 핏자국이 생겼다.
나는 통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일어섰다.
부드러운 낙엽더미에 매목해 있던 자갈톱.
소음이 요란한 대웅전을 보지 않고 부도가 서 있는 쪽으로 나오다 보니 학생들 여남은 명이 키가 큰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모여 있었다.
불교모임 수련회라도 온 모양이었다.
개중 진지한 얼굴은 두엇 뿐이고 나머지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섞인 표정으로 안내문을 들여다 보거나 저희끼리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우주의 모든 만물은 각자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것은 다만 얼굴만 달리하는 것 뿐이지요. 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요, 사랑과 증오도 둘이 아니며 생과 사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스쳐 지나면서 문득 그 스님의 말이 귓등에 얽힌다. 불이문을 안내하는 중인가 보다.
운지가 멈칫 하다가 뒤를 돌아다 본다. 나도 따라 뒤를 돌아다 본다.
안내를 들으면서 학생들은 우르르 계단을 내려간다. 성큼성큼 걷는 스님을 따라 잎 고운 어린 것들이 또 병아리떼 처럼 또 팔랑거리며 날아간다.
대웅전 쪽에서 텅텅 울리는 망치 소리 말고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사라진 절은 조용하다.
망치 소리가 들리는 데도 절간은 이상하게 조용하게 보인다.
다시 돌아서는 운지의 눈길이 정처없이 겉돌다가 나와 얽힌다.
운지의 눈가가 파랗게 질려 있다고 생각한다. 운지의 눈길이 발 끝으로 떨어졌다.
그날 운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리창에 기대 눈을 감았다가 차가 덜컹, 하는 바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눈을 감는다.
가늘게 감은 눈가로 물기가 젖어든다.
습자지에 물기가 배어나듯 흰 눈가로 고요하게.
"운지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 것 같애. 열이 자주 나고 밤에도 잠을 잘 못자. 혀에도 곰팡이가 하얗게 피고 죽만 겨우 삼키더니 요즘은 그것도 잘 못 먹나봐.
어젠 운지의 혈구를 염색한 걸 보았어. 붉은 꽃밭이어야 한다는데 운지의 것은 온통 파래. 파랗게 뭉클뭉클한 꽃들이 가득 피었어. 도무지 줄 생각을 안해"
통도사에 다녀온 날 밤 명숙언니가 한 말이었다.
운지는 기념으로 제 혈액을 염색한 슬라이드를 병원 검사실에서 얻어왔다.
유리 케이스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가 명숙언니의 고물 현미경으로 가끔 들여다 본다고 했다.
운지는 만성 임파구성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