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읽긴 다 읽는 거야?”
미술관련 열에서 제법 무거워 보이는 도록 몇 권을 들추던 P가 물었다. 중고책이겠지만 상태가 꽤 좋아 보이는 중세미술사다. P의 눈썹이 올라간다. 호! 월척이군.
나는 내가 뒤적이던 당(唐)시집을 내려놓고 P의 책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나도 좀 보여줘 봐.”
건네받은 책을 열고 책장을 넘겨본다. 괜찮다. 도판의 화질도 글씨 폰트도 맘에 든다. P가 고개를 흔든다. 양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기. P가 횡재한 책의 제목과 출판사를 재빨리 메모한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봐야겠다. 이 정도 좋은 책이 중고서점까지 나오긴 어렵다. 애초에 구매자가 많지 않은 책이니 아마도 초판으로 절판이기 십상이다. 아쉽다. 공연히 조선미시사 서열에서 시간을 허비한 탓이다. 내가 찾는 책은 중고서점에 나오지 않았다.
“읽기는 읽어야지.”
한숨을 쉰다. 지난 연말부터 대책 없이 욕심을 부려 끌어들인 책이 서재 한쪽을 제법 크게 차지하고 있다. 읽어야 할 책들이 계속 늘어나니 언제나 다 읽을 수 있을는지 도무지 요원하다.
“하긴 다 읽으려고 사는 책도 아니고 사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니까.”
“사재기로 스트레스를 풀만큼 부르주아도 아니라는 게 문제.”
P가 흐흐 웃는다. 그러는 저도 다 읽지도 못할 책을 대책 없이 꾸역꾸역 사들이고 있는 꼴을 내가 안다.
“비평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읽어야 할 책들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급해지거나 게을러진다.”
“김현!”
“그렇지.”
“비평가만의 딜레마일까. 글을 쓰겠다고 얼쩡거리는 인간들 대다수가 그러겠지.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쓸 시간은 너무나 적지. 거기서 자기 것을 만들 시간은 더더구나 적고.”
“숙제야.”
“해결 안 될.”
P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읽을 책은 산더미 같고, 그 책을 다 읽는다 해도 내 머리에 쌓이는 낱말들은 너무나 얇아서 부스러지고 사라지기 쉽다. 먼지처럼. 본디의 형태는 단단한 옹이였으되 내 가슴에 쌓이는 것은 마른 잎새처럼 먼지가 되어 부서진다. 옹이를 담을 그릇이 못 되는 까닭이다.
“무얼 쓰고 싶어?”
“모르겠어. 사실은 그게 숙제야. 내 머릿속을 오가는 귀신들이 저마다 제 얘기를 해 달라고 줄을 서. 돌말만 해도 그렇지. 노총각 형제도 남아 있고, 먼 나라에서 시집 온 가엾은 과부도 기다리고 있고, 애를 뺏긴 이혼녀도 있고.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그 마을이 아무래도 조만간 물 속에 가라앉을 것 같아. 하기는 생각하면 그게 더 나을 것도 같고. 통째로 수몰된다고 해도 누가 아쉬워할 만큼 괜찮은 인간들도 별로 없어.”
“그 마을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넣고 싶은 사람들이 더 많을 거야.”
P가 낄낄 웃었다.
“카산드라 얘기도 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카산드라도 좋긴 하지만 난 착한 년은 재미가 없어. 메데이아 쪽이 훨씬 매력 있지.”
자신의 나라와 왕인 아버지를 날려버리고 택한 남편에게 배신당한 여자. 남편에게 복수하려고 정부와 자신의 아들들을 제 손으로 난도질한 여자.
“그렇긴 하지. 죽어서 천당 가는 착한 년들 얘기보다는 살아서 어디든지 가는 나쁜 년들 얘기가 훨씬 재미있지.”
P가 고개를 끄덕인다. 목덜미에 닿는 풀오버 끝이 낡았다. 보푸라기를 떼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간다. 손을 뻗다가 멈칫 한다.
“감당할 능력은 되나? 말로만 날마다 떠들면서 내놓는 건 맨날 삽질. 알맹이도 없는 싸구려 이미지로만 떡칠을 하는 주제시면서.”
푸핫. P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인간이야. 낄낄댄다.
“정말 쓰고 싶은 건 뭔데? 설마 진짜 평생 그 말도 안 되는 촌구석만 헤매고 있을 건 아닐테고.”
“그 마을이 제발 통째로 수몰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냐. 에잇! 정말 다이너마이트를 트럭 째 부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무슨 얘길 쓰고 싶은 거야 정말?”
“나도 모르겠어. 나란 인간이 애초에 뭔 밑그림을 촘촘히 그려서 고심하면서 쓰는 타입도 못 되고, 사실 그런 능력도 없고. 그냥 그 날 그 날 내 손끝에 끌려나와 고생하는 사람들이지 뭐. 다른 건 몰라도, 이 학기 안에는 겨울에 쓰다 만 나쁜 여자 얘기를 끝내고 싶어. 자료가 너무 없어 고생이긴 하지만.”
“개화기 이전의 규방의 여성들이 뭘 하고 살았는지 알려주는 자료 자체가 드물긴 하지. 하지만 뭐 어때? 네가 어차피 치밀한 구조와 고증으로 밀고 나가는 인간도 아니라는 건 남들도 다 아는데 그냥 상상력으로 밀어부쳐!”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1그램 정도는 살아 있어서. 묘사가 부족하다고 늘 깨지는데 대놓고 건질 것도 없는 싸구려 이미지로 다 덮어 버릴 수는 없잖아.”
“대충 하자. 내용도 길다면서. 게다가 이미 전작이 통째로 스포일러인데 결론은 다 나와 있는 거 아냐?”
“문제는 전작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지. 그리고 전작과 상관없이 그냥 따로 또 하나이기도 하니까.”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되게 고민하는 척 하네.”
입꼬리를 올리면서 웃었다.
P가 중세미술사를 안고 다른 책을 뒤적거리는데 팔꿈치 끝에 보이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내 눈길을 P가 따라가기 전 잽싸게 잡았다.
북유럽신화사다. 출판사를 보니 입맛이 쓰다. 교정이 엉망인 책을 양심도 없이 몇 권이나 낸 출판사다. 읽다 교정이 안 된 책을 보면 짜증이 난다. 이 출판사 교열부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했던 적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어차피 이런 책은 정해진 소수의 독자를 타겟으로 내는 책이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이런 책을 낼 때는 그만큼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도판의 화질이 월등하게 좋아서 여러 번 고심을 하다가 매번 낚시질을 당하는데 언제나 뒤끝이 안 좋았다. 책장을 넘겨본다. 역시나 그림도 좋고 화면 구성도 맘에 든다. 갈등이 생긴다.
“거기 책은 별로야. 도무지 뒤끝이 말끔하지를 않아. 원작자는 이런 식으로 번역하는 걸 알려나 몰라.”
P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다시 꽂아놓는다. 역시 안 되겠다.
“내용도 없다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써대? 다 거기가 거기. 건질 것도 없어 보이는데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 아닌가? 이쯤에서 좀 쉬면서 좋은 책을 꼼꼼하게 읽으며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이던 걸.”
P의 장점은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냉정하다는 거다. 적당히 봐 주면서 인정을 베풀지를 않는다.
“하지만 쓰다가 멈춰지면 다시 안 써질 것 같아서. 굳어버린 머리 억지로 기름칠 한다 셈치고 막 굴려보는 거지. 이쯤에서 쉬면서 정말 심각하게 남의 글을 우선 읽어봐야 하나 싶기도 해.”
“너무 많이 놀았어. 그러게 예전 선생도 그랬잖아. 세상에 대한 관심을 고만 좀 접어주는 것이 너한테 정말 필요한 거라고. 우물에 물 고일 틈도 없이 바닥까지 죄다 박박 긁어내서 바깥 세상에 신경이 다 가 있는데 글은 개뿔. 십년 넘게 나돌아 다니면서 다시는 이쪽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할 것처럼 절 구경만 다니더니 잘 한 짓이다.”
“문사철 중에서 문학은 빠졌지만 그래도 그동안 그럭저럭 잘 놀았어. 어딘가에 남아 있으면 좋고 아니면... 뭐 하는 수 없지만.”
한숨을 쉬면서 웃는다. 버겁겠지. 버거울 것이다. 적은 나이도 아니고 밥벌이하는 틈 사이, 되는 대로 날리는 글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고 늦은 밤에 전화해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쉬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애초에 재주도 없으면서 어쩌자고 그런 시작을 한 건지. 튼튼하게 잘 쓰는 재주도 없으면서 시간을 쪼개서 쫓기면서 쓰다보니 그나마 다지고 매만질 시간도 없을 것이다.
P가 더 고를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더 찾을 것이 없다. 당시집과 우키요에 화집 한 권을 건졌을 뿐이다.
P를 따라 계산대로 갔다. 줄이 한참 길다. 맨 끄트머리에서 나란히 서서 앞서 계산하는 사람들의 뒤통수를 멀거니 보고 있는데 P가 문득 한숨을 쉰다.
“뭐야?”
“내 주제에 정말 안 어울리는 소리긴 한데 말야... 전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한 말 생각 나?”
“뭐?”
“좋은 인간이 좋은 작가일까. 좋은 작품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 만드는 것일까.”
“아 왜 또!”
“나 요즘 가끔 그 생각을 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재기를 타고 난 사람도 아니지. 소설은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말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학이든 어떤 예술이든 기본적인 재능은 필요한 거니까. 애초에 그런 게 없다는 건 아니까, 나는 그냥 눈 밝은 독자로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언감생심말야 그러니까. 그런데 말이지... 만일, 정말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는 작가가 될 기회가 주어졌다고 쳐. 그런데 그 대신, 내게서 괜찮은 인격, 아 그러니까 그런 게 있다고 치자면 말이지. 그런 걸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걸 선택하게 될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 그래 알어. 그렇게 어이없다는 표정 안 해도 나도 나 자신을 안다고.”
“그러니까 지금 네가 파우스트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 주제에.”
“너도 알다시피 나는 속물이고 적당히 위선을 떨면서 살아왔지. 다른 욕심은 없었어. 그냥 죽을 때까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적어도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쓸모가 없는, 그런 인간은 아니고 싶었다고.”
안다. 그를 알고 지내온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내가 아는 그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물론 제 말대로 적당히 속물이기도 하고 적당히 기분파이기도 해서 주위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은 있었지만 대체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인간이었다. 이 부박한 세상에 무얼 그리 애면글면 속을 썩이며 분노하는지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이 세상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그는 그가 바라는 미래에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상주의자기도 했고, 반대로 이 시간을 혐오하며 그 자신을 망가뜨리는 비관론자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그의 신념에 대체로 충실한 편이고 또 교과서처럼 꽉 막힌 인간이어서, 중학교 때 배운 사자성어 그대로 지행일치, 언행일치를 지키려고 대체로 노력하는 답답이였다. 지키라는 질서는 잘 지키고 나쁘다고 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평생을 살아 왔다. 물론 나는 그의 이런 행동 이면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의 상처도 짐작은 한다. 다른 누구가 다 살지 못하고 간 생을, 그가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 대신으로 사는 시간을 나쁘게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성공한 소설가와, 평생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저자의 장삼이사로 살다가 흔적 없이 또 그렇게 가더라도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어 하는 길을 비교하며 고민한다는 것은 절대로 작은 무게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둘 중 어떤 걸 ‘선택’해야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알아. 두 개념이 반드시 상충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꼭 그래야만 한다면 어떤 걸 선택할까.”
“그래서 너는 무얼 선택할 건데?”
“잘 모르겠어. 그런데... 아마도 나는 좋은 사람으로 인생을 그냥 사는 길을 선택할 것 같아. 그게 옳은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쉽게 포기가 될까?”
P의 표정이 잠깐 굳는다. 이마를 찡그리고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이 길이 그냥 여행 같아. 긴 여행. 평생 미혹당해서 끌려나온 길이지. 무슨 목표가 있어서 치열하게 어떻게든 이루겠다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런 확신을 가질 만큼 내가 뛰어난 재주가 있던 것도 아니고. 포기도 못하고 그저 평생 얼쩡거리고 기웃거리면서 그냥 타박타박 걸어왔지. 길에 들어설 때는 아킬레스를 만났고, 그러다 히스클리프도 만나고 김환도 만나고 또 가다 박정만도 만나서 헝클어지기도 하고. 숙제처럼 뭘 반드시 해야겠다 그런 건 아니었어. 그냥 자연스럽게, 타고나길 그런 것처럼. 다른 데는 한번도 한눈팔아본 적도 없고 그냥 끌려나온 것 같아. 내 길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고, 어쩌면 그냥 미혹당해서.”
“미망인 줄도 모르고.”
“그렇지. 아마도 평생 이 미망에 사로잡혀서 그대로 죽어버리겠지.”
“뭐 좋은 사람으로 그렇게 끌려다니며 살면 되겠네.”
“그런가?”
P의 웃음은 씁쓸해보였다.
“우리는 그냥 끌려다니다 끝날지도 몰라. 영웅이 지나갈 때 박수치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니까. 이 미망에 혹한 인간들 중 몇이나 영웅이 되겠냐. 대부분 박수부대 노릇이나 하다 끝나는 거지.”
“평생, 흔들리지 않고 무엇인가에 매혹되어서 산다는 건 나쁜 건 아니야. 생각보다 썩 괜찮을 때도 있어. 쓸쓸함을 견딜 힘만 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쓸쓸함을 견딜 힘을 기르는 것. 무력한 그와 내가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걸어가 볼 거야?”
내 말에 P는 잠자코 웃었다.
계산대의 줄은 어느새 다 줄어들었다. P가 내미는 미술사 책뚜껑의 바코드를 찍으며 점원이 비닐봉지를 내주었다.
계산을 마친 P가 이번에는 내가 산 책을 담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애초에 사로잡힌 자는 도망칠 방법이 없어. 그냥 끌려가는 거지. 기역니은을 맨 처음 머리통에 집어넣은 그날 이후로 어쩌면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그냥 그들이 팍 들어와버린 거야. 그렇게 되어버린 것처럼... 그냥 잡힌 것 같아. 이 여정 끝에 뭐가 기다리는지 몰라도 그냥 끌려 가 보는 거지. 다른 방법을 나는 모르는 거고.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서 마을을 통째로 날려버려 볼까 어쩔까 고민하고, 자식들을 모두 읽고 개가 되어 떠도는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쩔까 절망하고 또 희망해보면서.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다른 방법이. 없지. 그냥 가 보는 거지.”
허우룩하게 웃는 P의 얼굴이 쓸쓸하다.
안 되는 건 영 안 되는 거겠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그의 어깨를 도닥인다.
“미혹되었다니. 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싸구려다. 허세다. 이러니까 날마다 터지지.”
하하 웃으며 어깨를 풀썩 흔드는 P에게 나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박수부대라면 영웅 근처에 세워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도 해볼만 할지도 몰라.”
우리 정말 재수 없어. P가 말했다.
“그러나 저러나. 한유주라니. 정말 어쩌자는 거야.”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자고. 한유주를 어떻게 말하겠어. 다들 난감할 걸? 시침 뚝 떼고 버텨보는 거야. 일단은 뻔뻔해지는 연습이 필요해.”
“나는 정말 요즘 젊은 애들 소설, 감당이 안 돼. 읽기도 너무 힘들어.”
“그게 우리 숙제야. 제발 이번 학기에는 채만식은 벗어나자. 채만식이 뭐냐 채만식이.”
“그래도 이야기가 되는 소설, 재미가 있는 소설이 좋은 걸 보면 정말 나는 어쩔 수 없어.”
“그것도 네 숙제고.”
P가 이마를 찌푸린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문학가들 판화가 빼곡히 붙어 있다. 저들 중 누구라도 닮아보기라도 했으면, 감히 그 사이에 낄 생각도 못하지만 그 빛을 좀 받기라도 했으면. 어림도 없다고, 김수영이 픽 웃는다. 흥! 나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시는 돌아보지 않을 거니까 선생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다 보고 나면 빌려줘. 오늘 가서 검색은 해보겠지만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왜 이래 이거. 각자 먹이는 각자 챙기자고.”
P는 가차없이 뿌리친다. 역시나 그의 장점은 군더더기 없는 냉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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