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에서 커피를 하나씩 뽑아들고 연과 나는 잠깐 학원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의 전화가 생각났다.
“연. 너 혹시 창짱뉘 기억나?”
“그럼! 그런데 창짱뉘는 왜?”
나는 연에게 그녀의 남편이 전화를 했다는 얘기를 했다. 다 듣고 난 그녀가 눈썹을 좁히고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더니,
“성섭. 너 혹시 그 사람 소식을 알더라도 남편에게 바로 연락을 하는 건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왜?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니 그냥. 나도 잘은 모르는데. 암튼 기분이 좀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연이 털어놓았다.
연이 기억하는 장강은 내 기억 속의 그녀와는 조금 달랐다. 아무 걱정 없이 해맑고 명랑한 모습은 내 기억이었고, 연이 생각하는 장강은 텅 빈 강의실에서 빌딩 유리창 밖을 오래 내다보고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학생들 앞에서 잘 웃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빈 시청각 강의실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연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들어오던 장강과 마주쳤다. 칸막이가 있어서 장강은 그 방에 누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눈치를 못했던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통화를 엿듣게 된 것 같아 기척을 내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장강은 울고 있었다.
너무 슬픈 목소리여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장강에 너무 놀라서, 연은 움직이지 못했다. 숨죽여 책상에 엎드렸다.
한국인 학생들이 알아듣게 또박또박 느리게 말하는 평소의 말투가 아니었다. 빠르고 매끄러운 얼화음(儿化音)을 모두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 정도는 되었다.
북경에 있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남자였고, 장강은 그를 몹시 원망하고 있었다. 너는 절대 한국으로 들어오면 안돼. 나는 너를 만날 수 없어. 나는 한국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 남자는 너와 달리 정말 성실해. 착하고 좋은 남자야. 나는 너를 잊었어. 네가 가족을 선택했으니 나는 이제 잊어버려. 나는 죽은 사람이야.
단호한 거절의 말과 달리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 나를 찾아오지 마! 나는 죽었어. 너도 죽었어. 너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니 이징 쓸러!!
전화를 끊고 장강은 한동안 울었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그렇게 울던 장강이 잠시 후 얼굴을 들고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돈하고 나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끔하고 단정한 평소의 모습이었다.
“남편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언젠가 여학생들하고 저녁을 먹던 날 들은 얘긴데, 남편이 북경 영사관엔가 일하던 사람이었대. 남편을 꽤 잘 본 중국 외무부 쪽 관리가 중매 해준거라지 아마?”
“부부사이도 좋아보였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라면 아쉬울 게 없는데 뭐 하러 어학학원 강의나 하러 나오지?”
“심심하니까 나올 수도 있지. 어차피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니까. 그냥 자기네 나라말 마음껏 하면서 시간도 보내고 뭐 돈도 벌고.”
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아보였는데. 모르지 뭐 사람 속은. 아무튼, 내 느낌은 그래. 사고가 아니라 혹시 고의잠적이지 않을까 싶어.”
“고의잠적이라고?”
“예를 들면 이런 거지. 결혼 전에 죽고 못 살게 연애하던 남자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고 장강은 한국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한국으로 왔다. 뒤늦게 후회하게 된 남자가 한국으로 그녀를 찾으러 온다. 결혼 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그 남자를 따라서 중국으로 돌아간다. 물론 중매해준 양 측의 어른들을 생각해서 실종으로 스스로 처리되고.”
“그럴까? 남편이 출입국관리소 기록을 안 보았을 것 같아? 더구나 그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잖아. 더 잘 알겠지.”
“그러네. 아 모르겠다. 암튼, 나는 잘 모르겠어. 안타깝긴 하지만 어차피 뭐 내 일도 아니고.”
연은 지도교수가 기다린다고 일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싶은 것만 봐. 너네 남학생들이 그 긴 머리에 혹해서 넋을 놓은 것처럼, 그 여자 남편도 그랬겠지. 그래도 결혼을 하고 몇 년을 산 부부인데, 그렇게 생짜로 모른다니 말이 돼? 사고는 아닐 거야. 내 직감이야. 암튼, 알아서 해. 뭐 이런 말을 그 여자 남편에게 해줄 필요는 없겠지만.
하지만 나는 연의 말을 듣고 여전히 석연찮았다.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피해자인 남편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 연락이 될만한 이들에게 전화를 해 보았지만 그들 역시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장강은 내가 본 모습이었거나, 혹은 아주 드물게 연이 본 장강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학원 이후로 그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 몇 번, 김응천에게
전화가 왔다. 답답했지만 나는 아무 소식도 전해줄 수 없었다.
“어쨌든, 살아있는 거잖아. 다행이네. 그래, 남편에게 알려줄 거야?”
김이 물었다.
“글쎄. 그런데 사람이 변했어. 이상해.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나를 기억 못하는 것 같아.”
“기억도 말도 정말 잃어버린 거 아닐까?”정말 말을 못하는 거 아닐까? 실어증처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내일 아침 이야기를 해 보고 나서 결정하자. 어쨌든 백방으로 찾고 있던데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한다는 건 아닌 거 같고. 일단 장강 얘길 들어보고.”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은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낮은 지붕 위로 우당탕탕 거센 비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안주가 동이 나자 김과 나는 깡소주를 마셨다. 솔배감팽, 고 이쁜 것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 지 아냐. 인사불성이 되어서 김이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보기는 참 이쁜데, 꽃으로 치면 진짜 양귀비 같은데 이건 정말 천적이 없는 거야. 야 그래도 그건 보기라도 이쁘지. 멀쩡히 살아있는 토끼 대가리 부수는 일은 좋은 줄 아냐? 그래도 너는 나보다는 낫다. 마셔! 다 잊어버리고 퍼 마셔 새꺄. 네가 안 한다고 걔들이 안 죽냐? 갈등하는 척 하지마. 너는 덜 떨어진 위선자든지, 아니면 진짜 모자란 놈이야. 야, 동물실험이 어떻게 없어지냐? 인간이 이만큼 수명을 늘인 데 걔네들 없이 가능이나 했던 일이냐? 인간을 토끼 대신 쓴 게 불과 몇 십 년 전일이야. 다 똑같아. 장교수나 너나 거기가 거기야 임마.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서 그 뒤의 기억은 없다. 엎어진 반찬접시와 소주병들 사이에서 겨우 눈을 떴을 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김은 아침 일찍 바닷가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쓰린 속을 억지로 달래며 난장판이 된 식탁을 대충 정리했다. 마당에 나가보니 태풍의 한 중간은 지나갔는지 바람은 아직 거셌지만 빗방울은 많이 잦아져 있었다.
바람에 살이 휘어진 우산을 쓰고 김이 돌아왔다. 태풍 상황을 보러 바닷가에 나갔다. 오후 정도가 되면 배가 뜰 수 있을 것도 같다고 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느냐고, 젊은 몸만 생각해서 그렇게 살다가는 아주 빨리 가는 수가 있다고 노파가 잔소리를 했다. 장강은 아침 내내 보이지 않았다.
“외자씨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요?”
내 대신 김이 물었다. 아마도 가까운 오름에 갔을 거라고 했다. 이렇게 비바람이 불면 저 혼자 오름을 헤메고 다닌다고 했다. 무사일로 어드레 경 돌암서? 미친년도 아니고 무슨 일로 그렇게 쏘다니는지 모르겠다고 체머리를 흔드는 노파를 보고 김이 내게 어찌할 건지 눈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의 말대로, 그날 오후 배가 들어왔다. 나타나지 않는 장강을 오전 내내 기다리던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돌아와야 했다.
김응천에게 아내를 보았다는 말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는 사이, 여름방학이 지나갔다. 다시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나는 여전히 흰쥐와 토끼를 죽였다. 안과실험이 끝나 새끼고양이들의 울음소리를 더 이상 듣게 않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구월이 다 갈 무렵, 뜻밖에 김의 전화를 받았다. 가을 바다가 좋다느니, 진짜 이번에는 제대로 보여줄테니 바닷물이 차가와지기 전에 다시 한번 다녀가라느니 속없는 말을 한참 늘어놓았다. 그러던 김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이더니 말했다.
“지난주에 외도에 다녀왔어.”
순간,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스쳤다.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을 주저하던 김이 드디어 말했다.
“외자씨. 아니 장강. 그 여자 죽었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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