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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창작계획서

by 소금눈물 2014. 1. 16.

 

‘창작계획서’라고 쓰고 나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창작계획서라니. 참말 이 날 이 때까지 뭔 계획이나 설계 같은 것을 미리 하고 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조정래선생 같은 분까지 감히 가지야 못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계획을 하고 자료조사도 꼼꼼히 하고 인물 관계도나 성격, 이름, 나이, 직업 같은 것을 미리 다 그려놓고 기초부터 캐릭터를 단단하게 만들어 올리는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저는 정말 그렇지를 못합니다. 짧은 단편이나 조금 더 긴 중편쯤까지 가 본 소설도 있긴 하지만 하나같이 저는 정말 대책 없이 그냥 질러댑니다.


 어떠어떠한 소설을 쓰겠다. 이 소설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말하거나 보여주겠다. -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느날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앉아 있거나 그림책을 보다 문득 자판을 열고 덜렁 누군가를 불러냅니다. 그리고는 길 위에 세워놓고 무작정 등을 떠밉니다. 느닷없이 불려나온 ‘그’가 길에 올라 터벅터벅 혼자 가다 누군가를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무언가 인사를 주고받고 같이 조금 더 가기도 하고 어느 길에서쯤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조금씩 생겨나고 하지요. 이 모양이다 보니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도록 제목은커녕 주인공 이름도 옳게 짓지 못하는 것이 태반이고 또 한참 쓰다보면 처음 쯤에서 만났던 사람 이름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다 까먹어버려서 엉뚱한 이름을 달고 한참 살게 하다가 부랴부랴 뒤늦게 이름도 나이도 다시 다 수정하고 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한 두 번은 주인공 이름이나 거친 줄거리를 대강 잡아놓고 시작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그렇게 시작한 글은 두 서너 장도 넘기지 못하고 때려치게 되더군요.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렇게 쓰게 되니 ‘재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주인공 이름을 붙이고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리고 하는 과정에서,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이야기의 과정에 먼저 질리고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도무지 써 지지가 않는 거예요.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고, 심지어는 이 소설이 로맨스가 될지 추리가 될지 그것도 정해놓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무작정 걸어가게 하고 그때 그때 주어지는 것에 제가 맞추어 적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더라구요.


  이러다보니 당연히도, 구성은 엉망이고 개연성은 개나 줘 버리는 상황이 되기 일쑤이고 뭐 그렇지요. 그래도, 일단 제가 편해요. 제가 편해야 어찌 되었든 글이 써지는 것 같아요. 언제나 정신이 들어서 제대로 글이 써질지 모르겠습니다. 참 큰일입니다. ㅜㅜ


 이보세요. “창작계획서”를 쓴다고 해놓고 벌써 말도 안 되는 사설만 주저리주저리잖아요.


 제 머릿속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저 혼자 지은 조그만 시골 마을입니다. 부여 읍에서 버스로 사오십 분쯤 가는 동네지요. 이름은 돌말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입니다. 나름 조금 번화한 시골 읍에서도 벗어난, 젊은이들도 떠나가고 대부분이 노인들인, 세월에서 비껴난 것만 같은 조용하고 조금은 쓸쓸한 곳이지요. 마을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이 조금씩 부풀면서 더 멀리 가면 백마강과 만나지는 그런 곳입니다. 돌말을 가운데에 두고 조금 더 들어가면 바깥말, 그러니까 한문 이름으로는 외동리가 되겠네요. 외동리 안쪽으로 수릿재 산비탈이 있고 산비탈 안 쪽으로 다시 한참 들어가면 안뜰말, 그러니까 내동리가 있습니다. 수릿재에서 조금 왼 편으로 비틀면 버려진 공동묘지가 있는 산동리가 이어지지요.


 이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십년 전 쯤에 몇 편 써보았습니다. 물론 그 때도 작정하고 처음부터 마을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지요.


 평생을 한량으로 살아온 철없는 박씨아저씨가 돌말에 살았습니다. 그 아저씨의 풋정을 버리고 도시로 달아난 다방 아가씨도 있었지요. 세월이 지나고 나서 모습은 조금 변했지만 여전히 돌말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아버지들. 도시로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향에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떠도는 불안한 청춘들. 저 혼자 약삭빠른 척 밉상을 떨고 살지만 그 자신 하나도 별다를 것 없이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밉상 면서기. 딸집에 얹혀 사는 치매 걸린 할머니. 젊은 시절 아웅다웅 다투었지만 함께 늙어가는 동서.... 한 편 한 편 조금씩 쓰다 보니 그런 이들이 모여서 그 마을 식구들이 되었습니다. 잘난 거 하나 없지만 또 하나씩 상처를 갖고 있으면서 어깨를 기대고 사는 착한 사람들요.


 가끔 생각 날 때마다 그렇게 불러 모은 사람들이 몇 되었는데 어느 순간 회의가 왔습니다. 시골 떠나서 결코 작지 않은 대도시에 발을 붙이고 살게 된 지도 삼십 년이 넘었는데 제 상상 속의 시골이 정말 지금 있기나 한 걸까. 현실의 농촌과 어쩌면 한 치도 겹치는 게 없을지 모르는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지나 않나 싶고, 무엇보다 제 글투가 너무나 올드하고 유치뽕짝이어서 실제 농촌에 사시는 분들이 본다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겁이 나더군요.


 누군가에게 냉정한 평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냥 심심파적으로 써 보다가 글이 조금씩 길어지면서 이래저래 심란해져서 그만 닫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벌써 한참이네요.


 창작수업.- 결국은 글쓰기 훈련이 되겠지요. 하여 저는 제가 혼자 놀다가 슬그머니 밀쳐놓았던, 그 가장 익숙하고 촌스런 자세로 돌아가려구요. 어차피 ‘훈련’이니, 지금 깨지는 건 괜찮잖아요 ^^;


 앞으로 7주,- (이제 6주군요). 가능하면 서너 편쯤은 그 마을에 다시 가 볼 생각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가진 어떤 주인공이라고는 말씀 못 드려요. 저도 모르니까요 -_-; 그냥, 돌말, 안뜰말, 바깥말에 몇 사람을 더 살게 하고 싶습니다. 장가 못 간 노총각도 한 사람쯤 있었으면 좋겠고 성질 더러운 남편에 붙잡혀 살면서 버리지 못하는 아내도 있을지 모르겠구요. 뭐 세상 어디에나 다 있을 그런 사람들이지요. 그 얘길 해 보고 싶어요.


 일단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촌스럽겠지요? 이런 얘기, 너무 흔한 얘기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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