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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테순이 소금눈물

인현왕후의 남자

by 소금눈물 2012. 6. 7.

 

사는 게 강퍅해지다보니 이젠 너무 힘든 드라마는 보기가 두렵다.

평이 그렇게 좋은 추적자를 보고 싶으면서도 유리같은 내 멘탈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차마 못 보고 있다.

현실도 괴로운데 상상의 영역인 드라마까지 피곤하고 싶지 않아서다.

 

마음도 몸도 고단하고 슬펐던 오 월, 공중파도 아닌 이 작은 드라마에 위로받으며 보냈다.

지상파에서 나왔더라면 시청률이 꽤 높았을 것이라 짐작이 되지만 이 드라마는 케이블, 그것도 아주 늦은 시간에 배정되는 불운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시청률수치는 그다지 높지는 않다. (케이블드라마치고는..이라고 항변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는 수치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이 드라마를 본다는 지인들은 퍽 많다. 그리고 '배우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모습도 보인다.

내가 보기에도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드라마와는 다른, 썩 괜찮은 미덕을 많이 갖고 있는 드라마다.

 

 

 

 

드라마리뷰를 쓰는 내 기준은 하나다.

시청률, 작품성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드라마의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여백의 크기다.

보기에 이 작품은 엄청난 돈을 들인 대작도 아니면서, 눈에 띄는 탑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도 아니다.

요즘 한창 유행인 타임슬립의 한 작품 정도로 남을 수 있는 구성으로 이렇게 반짝거리는 좋은 작품을 만든 것은, 우선은 작가의 발랄하고 씩씩한 필력과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과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이 완전히 몰입되어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겠다. 그들이 펼쳐놓은 이야기판에 내가 귀를 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만든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주인공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산뜻한 캐릭터가 우선 돋보인다.

이 드라마 캐릭터들의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하고 건강한 욕망이다. 자신의 사랑을 애써 포장하거나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다. 솔직하고 당당하다.

 

여주인공 희진은 지금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전직 미인대회 출신의 한물 간 배우다.

월세방에 그것도 매니저하는 친구랑 둘이 사는 처지에 여기저기 오디션장에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신세다.

그렇지만 희진은 구김살없이 건강하고 씩씩하다.

처음 만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조선남자를 만나서도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을 고백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희진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구질구질하지 않으며,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이른바 잘 나가는 서브남주의 공세에 절대 흔들리지 않고 거침없이 함께 넘는 것은 희진의 용기와 씩씩함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처지지만 함부로 감정을 낭비하지 않으며 가진 것이 많아졌을 때도 오만하지 않는 여주의 사랑스러움. 까짓 영어철자 한 둘 쯤 틀리면 어떤가. 아는 것이 많지 않으면 또 어떤가.  이 세상 모든 것이 그와 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장치들로만 이루어졌는데. 어차피 아무리 과거에 (무려 삼백 년 전의!!) 잘 나갔던 남정네라 해도 현대에 떨어진 그 남자보다는 백만 배는 더 똑똑하지 않은가. 이 자신감!!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그 사랑만큼 자신을 아끼며 당당한 희진.

이 남자 저 남자, 휩쓸리며 민폐가 되기 일쑤인 요즘의 여주인공들 중에서 이만큼 사랑스럽고 멋진 여성을 본 적이 없다.

 

붕도 또한 마찬가지다.

부모와 아내를 당쟁의 와중에 몰살을 당하고 그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절체절명의 처지에서도 그는 선비로서의 자세와 기개를 잃지 않는다. 기럭지 훌륭하고 몽타쥬 완벽하고 학문이면 학문, 무술이면 무술, 게다가 시간이동의 결과로 상상조차 못했을 엄청난 사태에 닥쳐도 삽시간에 그 문명의 이기들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능력, 참말로 불가능한 인간형 아닌가.

 

스마트한 김붕도.- 딱 이 한마디외에 다른 꾸밈말이 필요없다.

자신을 오래 연모해온 윤월에게도 인간적인 연민과 고마움을 품고 있지만 연정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임금 앞에서조차 굽신거리지 않으며 아무리 막강한 정적에게도 그는 나약하거나 굽혀지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 신의를 잃지 않고 상대방과 자신을 사랑하며 지키는 모습. 깔끔하고 단정하다. 감정을 함부로 질질 흘리며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던 종에게도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처지를 배려해주는 모습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그의 품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조연들!

 

 

오래 연모해왔던 윤월은 자신의 사랑의 지분을 애써 주장하지 않는다.

주인이 살아있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생사와 시간을 넘나드는 붕도의 일탈을 지켜보며 자신의 생명조차 아낌없이 내던지며 지켜주는 이 여인의 사랑과 기상 또한 아름답다.

바라보는 자리의 위치조차 허락하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버린다는 선언 앞에서도 그는 눈물로 바짓자락을 잡지 않는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오매불망 사랑한 그 남자의 안녕일 뿐이다.

 

 

 

이 쿨하고 명랑한 친구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드라마 초입부터 내 눈길을 먼저 잡은 것은 유인나보다는 가득희였다.

쯧쯧~ 의성어 하나로 모든 희노애락을 표현할 줄 아는 이 배우의 명랑쾌활한 연기. 나는 홀딱 빠져버렸다.

 

별 볼 일 없는 처지의 무명배우인 친구의 온갖 궂은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매니저인 수경. 수경이보다 더 희진을 보호하고 위로해주는 매니저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디서 보도듣도 못한 사내를 애인이라고 데리고 온 희진.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여배우에게 남자친구의 존재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일이다. 가족도 없고 어디서 뭐 하는 놈(-_-;)인지도 모르고 신분증조차 없는 이 알 수 없는 불한당을, 순진하기 그지없는 희진이 미쳐서 서울로 제주로 뛸 때도 희진은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다 따라다니며 치닥거리를 한다.

그 불한당이, 부모에게 받은 유산이 적지 않고, 그나마 시집살이를 시킬 그 부모도 없고, 한다하는 학교의 대학원생이라니 신분도 믿을 만 하고, 생긴 것도 멀끔하고, 무엇보다 둘이 좋아죽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다. 무엇보다 수경은 희진이 행복하다면 된다. 그 안정된 행복을 위해 잔소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희진이 사랑을 잃고 통곡을 할 때 함께 울어주며 안아줄 수 있는 수경이 있어서 희진이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희진은 통곡하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수경이 있기 때문에.

 

한동민도, 윤나정도 마찬가지다.

찌질한 엑스남친의 역을 맡은 한동민이나, 자칫 악역이 될 뻔했던 나정.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드라마처럼 주인공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모함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나름 자신의 사랑과 감정에 충실하면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인공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찌질하지 않는 것은 그들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당당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심통은 나지만 과하게 발을 걸어 괴롭히거나 상대의 운명을 장난질치지 않고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툴툴대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들이 밉지 않은 이유다.

 

힘보다는 짐이 되기 일쑤인, 발목을 잡는 비틀린 가족도 없다. 음험한 출생의 비밀도, 어마무지한 재벌도, 권력도 등장하지 않는다.

저마다 발랄하고 씩씩하다. 젊음의 용기와 당당함으로 무장한 청춘들이다.

 

 

 

 

이제 한 회를 남겨둔 때. 모진 운명을 헤치고 비로소 행복해졌다고 안심하며 가슴을 콩닥거리는 바로 그 순간, 상상도 못했던 운명이 들이닥쳤다. 지금까지 절대조건으로 작용했던 부적의 존재 자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상상할 수 없었기에 대비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캄캄한 이별 앞에 서 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전반 내내 울음바다를 만들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 씩씩한 주인공들은 잘 이겨낼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리고... 그처럼 아름답고 서러운 편지를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내게

그 단장(斷腸)의 슬픔을 다시 떠올리게 한 장면.

 

 

 

이것은 당신에게 쓰는 서신인 동시에,
나에게 쓰는 글이오.

내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을 잊을지도,
아니면 이 글조차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내가 아니면 당신이,
혹시나 기억을 붙들고 살게 될지도 모를 누군가를 위해 쓰는 글.

내가 이 부적을 우연히 얻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인과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소.

처음에는,
좌절했던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 그 과라 생각했고,
그 다음엔,
당신을 만나 인연을 잇는 것이 그 과일지 모른다고 여겼고,
그 다음엔,
다른 세상에서 새 인생을 사는 것이 그 과라 생각했으나,
이제야 뒤늦게 깨닫게 된 인과는,
목숨을 구한 인으로,
내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것이 과였소.

나의 미래,
나의 명예,
나의 가치관,
내 사람들,
그리고 당신까지.

목숨을 얻으려면 다른 모든 것을 잃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소.
그중에 하나쯤은 갖고 갈 수 있다고 믿은 내가 어리석었을 뿐.

어디까지 잃어야 댓가를 다 치르는 것일까.

당신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
그것조차 사치라는 걸,
이제 깨달았소.

기억,
우리들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

기억,
그것이 내가 잃어야 할 마지막 댓가.

이제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소.
우리가 서로를 잊고 살게 될지,
아니면 기억을 놓지 못한 채 영원히 괴로울지.

마지막 바램이라면,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싶소.
목표도 없는 여생에 그 기억조차 없다는 건 지옥일 듯 해서.

그리고 당신은,
그리고 당신은,
훗날 이 글을 혹시나 읽게 되더라도,
누구를 향한 서신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길 바라오.

 

구구절절, 편지를 눈물에 적시며 써내려가는 붕도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사랑 그 자체이다.

이런 사랑을 나는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삶의, 가치관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내가 있거나 없거나...
너의 신산한 세상살이가 무에 달라지겠는가마는..
부디 살길을 도모해...나와 같은 인연을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다모>

 

어린 중노미의 입을 통해 옥에게 전해지던 옥사의 종사관의 마지막 편지.

죽음을 앞둔 그가 담담히 써내려간, 드러내지 않으나 결단코 감춰지지 않았던 그 죽음과도 같은, 형벌과도 같았던 마지막 사랑의 인사.

윤의 편지는 살아서 같은 시공간 안에서 상대에게 전해질 수 있었으니 붕도보다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그 짧은 생의 유일한 빛과도 같았던, 독과도 같았던 사랑의 기억을 이제 놓고 가라는 말은 결단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기 때문에, 잊혀짐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임을 알면서 기억의 형벌로부터 상대를 풀어주고 싶은 애절함으로 더 뜨겁고도 눈물겹게 다가온다.

 

어쩌면 통속이 될 것 같은 밝은 로코물에서 문학성이 반짝이는 작가의 필력을 만난 장면이었다.

되돌아 생각하면 이 편지의 진중함과 깊은 지성은 지금까지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전개와 상관없이 이 편지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뜨겁다. 통속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박정만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위해 작가가 쏟은 붓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하지 않겠는가.

 

길게도 썼다.

몇 줄 휘갈겨 쓰고 <얼음꽃> 다음 이야기를 떠들 참이었는데 오늘 하루를 날려버렸다.

 

지금까지 맡았던 그 어떤 역보다도 가장 예쁘고 기가 막히는 연기를 보여준 것은, 그 캐릭터의 옷과 너무나 잘 맞는 배우들의 힘이었지만 (정말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던 희진,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멋졌던 붕도) 이 작가의 다음 작을 나는 주목해보기로 한다. 행복한 기대다.

 

떠나보내기가 정말 아쉽다.

이렇게 좋은 드라마를 만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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