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위대한 작품들이 쏟아져나왔을까.
아테네 사람들은 축제의 날에 이런 비극을 관람하며 신이 인간에게 내린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고뇌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한탄하고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신 본연의 승리를 기원하며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놀랍도록 명징한 이성의 정수를, 인간 존재의 비극적인 조건과 실존의 아픔을 해부하며 체화했을까. 그 오래된 시대, 인간의 지성이 가지는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었다.
늘 가까이 책을 두고 살지만 언제나 그 책읽기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쩌다가 벼락같은 '독서의 행복'을 경함할 때면,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가슴 벅찰 정도로 감사하다.
내 '책읽기'의 맨 처음의 기억은 '일리아드'였다고 했다. 그 첫 독서의 행보가 어쩌면 내 삶 내내 그 책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했고 그 주인공들과 더불어 내 서고를 나누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40여년을 이렇게 한 책의 언저리에서 오가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아주 드물고 복된 경험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구구절절 말이 많았다. '좋은 책'이라기보다는, 이 책의 주인공들이 살다간 너무나도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삶이 준 눈물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슬픔으로 그저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새벽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처럼, 오만하고 탐욕적인 제우스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제우스와 맞서다 고통을 겪는 신들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전쟁'이 낳은 피의 기록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작품은 한 여인의 미모를 두고 벌인 어리석은 신과 남자들의 10년 전쟁 '트로이 전쟁'이 낳은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이야기다.
모든 것들의 창조이고 마지막이며,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또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전쟁. 이 비극은 아테나이를 둘러싼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들에서 벌어진 인간의 고통. (단지 '고통'이라고 말하기 무엇한, 다른 대체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아무리 고심해도 내 말의 한계가 이렇게 짧고 가볍다는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가 다루는 신들과 인간의 격정적인 삶과 죽음을 둘러싼, 그 죽음의 주인공과 남겨진 사람들의 처절한 분노와 비탄을 읽노라니 21세기의 인간인 나도, 이 고통에서, 인간의 이 끔찍한 존재의 틀 안 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도 기막히다.
내가 사랑하고 슬퍼했던 수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아픈 것은 역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다. 신이 과연 공정한가. 신은 그들의 말마따나 공정하고 지혜로우며 정의로운가를, 인간들의 눈물속에서 통렬하게 고발한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어떤 목적으로든 전쟁은 얼마나 간악하고 끔찍한 저주인가, 그것이 특히나 여성과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서리치게 깨닫는다. 트로이는 후세 사람들의 슬픈 노래를 위해 이 역사에 왔다 갔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트로이 왕가 여인들이 감당해야 했던 비극, 트로이 왕비 헤카베와 그 며느리,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 헤카베의 딸들인 카산드라와 폴뤼크세네의 참혹한 죽음들은 정말이지 무어라 형언할 말이 없다. 전장으로 나가는 자국의 병사들 앞에서 이런 비극을 공연했던 에우리피데스나 그 시민들을 보면 그들의 정신이 지금 이 나라의 무지막지한 전쟁론자들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드높은 정신을 가졌던가. 그들은 어떤 신도 믿지 않고 어떤 신에게도 기대지 않고 그 신이 만든 인간의 한없이 슬픈 존재, 인간의 고통에 울었던 것이다. 눈 앞에서 가족을, 남편을,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학살당하고, 그 원수의 성적 노예로 끌려가 그 아들을 낳고 그 아들마저 죽임을 당해야 하는 비극의 여인들, 그들이 신에게 바치며 노래했던 향기로운 제물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리석은 놀음으로 인간들을 처절한 고통에 빠뜨린 신들은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며 자신들의 싸구려 자존심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그 작은 존재들을 이리저리 피속에 담그고 난도질해서 죽여버린다. 명부에 내려간 그들의 영혼 또한 안락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의 겪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통 조차 안중에 없다.
그런 신이 과연 인간에게 필요한가. 그들의 행위는 찬양받기에 마땅한가!
인간이 신이 될 수 없는 이상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그 존재의 고통, 읽는 내내 뼈가 저린 이 슬픔의 뿌리... 아킬레스나 헥토르 같은 위대한 영웅도, 아이아스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패배자'도, 안티고네와 메데이아 같은 뒤꼭지 서늘한 강한 여인들도, 헤카베와 안드로마케 같은 슬픔의 여인들도 모두, 신이 저지른 장난의 수레바퀴에 살과 넋이 찢기고 피를 뿌리는, 생명을 받았기에 겪어야 처절한 고통.
전쟁이 주는 고통이 어찌 트로이와 아테네 전쟁들 뿐이랴.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이 낳은 비극이 지구상에 넘쳐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 참혹한 전쟁의 피해자로 종전 60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몇몇 권력자들의 이기적인 탐욕이 만든 다툼이 이렇게 엄청난 슬픔으로 이천 오백 년을 거쳐 아직도 노래되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이 노래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진행이고 미래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인물 하나 하나가 쉽게 마음을 떼어내지 못는 절절한 비탄의 주인공들이라 책 읽는 속도는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책장을 덮는 지금 이렇게 커다란 감동과 한숨으로 잠을 설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그리스와 트로이 비극들을 정리하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책장 가득 인간에 대한 연민과 슬픈 여인들을 향해 보내는 위로와 분노로 감동케 했던 지은이의 마음이 너무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며 지은이의 다른 책을 서둘러 주문했다.
아아 이 새벽이 참 좋다.
좋은 아침이다.
제목 : 그리스 비극-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지은이 : 임철규
펴낸 곳 : 한길사
* 이 책의 감동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할 것 같다.
추천할 책은, 트로이 전쟁의 발발과 결말을 담은 호메로스의<일리아드>, 그 전쟁 이후 그리스병사들의 귀환을 그린 <오딧세이>, 그리스 신들의 대략적인 그림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헤시오도스의 <신통기>,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 꼭 먼저 읽어봐야 할 책 <그리스 비극>이다. (임철규의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비극> 자체 텍스트가 아니다. 그 책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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