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홀연 하늘바다 어딘가로 떠나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습니다. 천 리 먼 길에서 달려간 시골 마당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모두가 똑같이 나와 같은 얼굴로 웅성이고 있었습니다. 삽시간에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마 믿을 수 없어 수런수런 모여 서 있다가 누군가는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는 그자리를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향해쇠스랑을 던지듯 저주를 퍼붓고, 누군가는 처마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그러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비틀비틀 지어지는 흰 천막 밖에서 서성이다 나는 그만 땅바닥에 엎어졌지요. 흑백영화의 필름이 느닷없이 뚝 잘려진 것처럼 암전... 그 밤이 그랬습니다.
참 아름다운 여름밤이었어요. 팔 다리를 다 뚝뚝 잘라놓고 오는 사람처럼 질질 끌려 나오는데 물돌 흘러가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요. 괜찮다... 세상의 시름도 욕망도 나는 다 놓았다.나는 놓여났다...숨을 쉬지 못하고 꺽꺽 몰아쉬는 내게 가만가만 흘러가는 도랑 물소리가 그래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누군가 시작했나요. 한 사람이 놓고 간 촛불이 먼데 간 마음을 불러 세우고 따라오던 발걸음들이 주춤주춤...어리둥절한 얼굴들을 바라보더니 길을 만들었어요. 한 촛불이 놓인 자리에 또 하나가 놓이고 풀벌레 가만 잦아든 자리에 이내 촛불의 강이 흘러들기 시작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장 아픈 밤에 나는 보았습니다.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 만든 촛불의 강물이 눈물에 일렁이며 나를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는 것 같이 외롭다 했던 날, 나는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마시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 바다를 혼자 건너지 않게 하겠다고, 내가 그 바다를 건너는 든든한 배가 되어드리겠노라 약속했습니다.
부끄럽고...아픈 고백입니다. 나는 당신의 든든한 배도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수상한 소문에 쉽게 흔들리는 귀를 가진 못난 지지자였습니다.
살아온 어떤 날 보다 길고 힘든 한 해였습니다. 손톱밑에 사금파리가 박힌 것처럼 나는 내내 아팠고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를 향해 서슬푸른 저주와 독설을 참지 않으며 비틀거리고 살았습니다. 사실은 나를 향한 미움이었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못난 주먹질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건강하게, 씩씩하게 잘 살아야겠다는 약속을...저는 아직 드리지 못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울고 서러워하고 미안해하고 괴로와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겨우 요만큼의 그릇밖에 안 되는 반푼입니다. 여기쯤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씩씩하게 가야 하는데 아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일 늦게까지 눈물을 흘리며 그 반짝이는 촛불의 맨 마지막 끝에서 주춤주춤 따라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약속드릴게요. 꺼뜨리지 않을게요. 평생, 그 캄캄한 밤 내 발등 앞에서 반짝이던 그 촛불의 길을 잊지 않고 살게요. 제가 가만히 내려놓던 그 촛불의 무게 하나만큼...그렇게 새기며 살게요.
이제는 평안하신지요. 가끔씩 우리를 내려다보며 웃기도 하시는 지요.
그립습니다.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했는데...그 마음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꽃이 진다고 꽃이었던 시절을 잊기야 하겠습니까.
참 좋았습니다. 참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그 시절...제 생애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갖게 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조금 더 울고 조금 더 힘들지 모르겠지만 기운 내서 살게요. 열심히 잘 살게요. 눈 감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고 잘 버티고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