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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낡은 서고

도무지 세상이란 참 더러워서

by 소금눈물 2011. 11. 28.

 

12/30/2007 01:22 am공개조회수 1 2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마당이 희부윰하다.
눈발이 비친다.
눈이 보기 힘들어진 겨울이다.
한참을 내려다 보았다.

눈이 무릎 밑까지 퍽퍽 쌓이던 어린 시절의 겨울.
아랫목에 열기가 느껴져서 잠결에 발을 뻗다 깨면, 새벽 일찍 일어나 군불을 때고 있던 아버지.
마당에선 거묵이가 컹컹 짓고.
마루끝에 날아와 쌓인 눈이 하얳다.

아버지도 거묵이도 없고
눈도 없는 겨울.

백석은 나타샤를 데리고 눈 깊이 쌓인 산골로 영 떠나버리고
도무지 더러운 세상만 남아 시끄러운 겨울밤
나는 소주도 없이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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