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디다. 그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墨痕)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매화> 중..
언젠가 서고방에 올려야지 올려야지하면서 내내 들여다보고 혼자 아끼던 책이다.
생몰연대를 보니 1904년 출생에 1967년에 작고하셨다.
짐작하겠다...
완자창에 어리는 매화무늬를 저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이에게 그 시간들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소용돌이였겠는지.
시대를 고민하고 민족을 아파했던 사람이 흙탕물에 휩쓸려가는 조국을 보며 어떤 심정이 되었을지를.
책은 아주 작다. 작고도 고졸하다.
소박한 초당에 이른 봄날 그윽한 매화한가지를 들여다보며 암향에 취한 선비가 그대로 보일 듯 하다.
결기바르며 속엣말이 많았던 이에게 그 시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그저 묵묵히 난을 치고 매화를 아끼며 살고 싶었을 이인데.
단지 결기 뿐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눈길이 참으로 따뜻하고 정결하다.
그의 호 <黔驢>를 두고 푼 소회가 참으로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뜻없이 지은 이름 <소금눈물>에 어쩌다 이만한 뜻을 달고 또 이름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를 쓰고, 그마저도 이 지푸라기같은 무게가 버겁던 차였다.
그가 호를 짓고 그 뜻을 지키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이 핑 돈다.
불러서 이름이지만 뜻을 담아 이름이기도 하지 않은가.
곱씹어 생각하면 세상에 뜻없이 나와 돌아다니는 말이 어디있겠는가만 무게지우면 한없이 무겁기도 하고 한없이 부박하기도 한 것이 그 이름인것을.
서고에 올리고 싶어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또 올리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주춤거리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책이 나같은 이에게만 걸릴까 아깝기도 했고 이렇게 좋은 책을 나 말고 다른 이도 모두 갖게 되는 것이 어쩐지 손해를 보는 것도 같아서였다.
내가 정말 사랑하고픈 이들에게만 몰래몰래 전해줄 것이다.
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책을 아는 이만 알아 귀하게 마음에 담겨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제목: 근원수필
지은이: 김용준
펴낸 곳: 범우사
'그룹명 > 낡은 서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어의 풍경들 (0) | 2011.11.24 |
---|---|
천 개의 공감 (0) | 2011.11.24 |
사랑의 말들, 말들의 사랑 (0) | 2011.11.24 |
한 권으로 보는 한국미술사 101 장면 (0) | 2011.11.24 |
궁지에 빠진 소금눈물. (0) | 2011.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