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중앙으로, 중앙은 곧 서울로 통하고, 변두리라도 서울 근처에서 비비적거려야 사람구실 제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라 위로받는 세상. 집요하고 답답하기는 글써서 먹고 사는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한데 누가 뭐래도 촌놈 행색으로 다니면서 자신이 촌놈임을 굳이 내세우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이 사람.
생긴 모습은 임꺽정이 봉두난발한 얼굴에 구부정하게 걷다가도 술기운이 거나해져서 마이크라도 잡을랍시면 그 생긴 모습과는 도무지 딴판으로 한없이 고즈넉하고 절절하게 노래를 부르는 이 사람.
신문사 이름을 걸고 낸 문학상에 수상작을 만든 작가이면서도 자기는 "대전일보 신춘문예" 출신임을 꼬박꼬박 밝히는 이 사람. 지방출신임을 굳이 거론하여 그 잘난 중앙문인 대접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 젊은 작가.
그가 한창훈이다.
개인적인 친분이 약간 섞인 바탕에, 무작정 그를 흠모하던 제자라 이런 글꼭지를 보면
"이 딱한 인사야, 아직도 그 철딱서니로 사니..." 혀를 차며 한심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나는 이 촌스럽고 우직하고 도무지 단단한 뒷산 참나무 같은 이를 무지하게 좋아하고 또 이런 이로 살고 싶었다.
잘난 이들 아옹다옹 정답게 모여사는 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고, 무슨무슨 감투질은 알레르기처럼 못견디면서도, 세상 허투루 나가는데 일침 놓는 이들 모인데라면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며 이름을 올리곤 했으니 이 어찌 짝사랑일망정 사모하여 애타지 않을 수 있으랴.
그의 책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이면서도 정말 웃다가 여러번 숨넘어가는 소설이 이 홍합이다.
(들입다 무거운 제목 들고와서 폼잡는데만 신경쓴다고 질렸던 분들, 읽어보시라 결코 이 사람의 자랑이 헛소리가 아닐테니)
이십대 후반의 별 볼일 없는 총각이 어쩌다 닿은 곳이 전남 여수 신풍의 한 홍합공장이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에 운전까지 해가며 한계절을 나는 이 총각의 나날이 소설의 무대가 된다.
사실 소설의 주인공은 이 사람이 아니고, 이 홍합공장의 여인네들이다.
하나같이 사연들이 홍합 낱낱의 알맹이처럼 들어차 있는 공장의 여인네들은, 있어봤자 별로 쓸모도 없는 집안의 남정네들을 대신하여 그 집안을 지키고 일으키는 원동력이고 기둥이다.
그곳에도 사는 곳에 따라 처지가 좀 다른 패들이 둘로 나뉘어져 그게 또 갈등이 되고 화합이 되기도 하는데, 여인네들 각자의 신산하고 말간 이야기들과 더불어 그 틈사이에서 벌어지는 도시와 어촌의 경계, 나이든 이들과 젊은이들의 갈등, 무서운 세상을 살아낸 사람들의 슬픔이 홍합살처럼 달큰하고 뜨겁게 어리는 것이다.
이 소설중에서 아마도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금이네의 스캔들일텐데,금이네의 용모와 행색을 말할작시면
나중 들통이 났을 때 이 대목에서 남자들이 줄줄이 욕을 먹어도 아무 소리 못하는 게 나왔다. 여자들 입장에서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아무리 치마만 둘렀으면 침을 흘리게끔 태어났다손 치더라 해도 너무한다는 거였다. 동네 여자들 줄줄이 세워놓고 인물 평가회를 하자면 무대에 오르지도 못하고 뒷전에서 벗어놓은 옷가지나 지키고 자빠졌을 인물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게 금이네요, 품성을 따져 보아도 뺑덕어멈 쪽과 계 묻을 물건이 바로 그 여자였다. 인물 처지고 성질 못되고 거기다가 몸매라고 봐줄 만한가 하면 쓸데없이 덩치만 큰 쌀자루라 그것도 아니고 어린 맛으로나 살을 붙여 보냐 하면 사십대도 중반이 넘은 게 재작년인데
이 인물이 온 동네 남정네들을 대상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그 내역을 상대에 따라 색깔을 지정하여 꼬박꼬박 달력에 기록해놓은 대목에서는 허리를 잡고 뒤로 넘어갈 밖에 -
지겹고 끝이 안보이는 고단한 인생살이에도 새싹같은 아이들의 희망이 있어서 어른들은 견디고, 캄캄한 젊은 과부의 길에도 살짝 꽃분홍색 춘정이 어리기도 하며 어쩔 수 없는 체념과 아쉬움이 함께 어우러져 해변의 홍합공장은 가을로 저문다.
낡은 타이탄 트럭을 몰고 뽕짝노래를 틀어놓고 문기사(주인공 총각)와 마을 여인네들이 흥얼거리고 지나가고, 그들이 지나간 길에서 아득하게 바라보는 듯한 이상하게 이쁘고도 쓸쓸한 아쉬움...
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고개가 끄덕여지면서, 가여운 승희네와 문기사의 춘정도 까짓것 저질러보지 뭐~ 그 태풍속에서 뭘 그리 꼼지락거리다 말도 못하고 말아뿐졌냐 싶은 아쉬움..애잔함...
낭자한 남도 사투리에 담긴 야유와 달관에 여러번 뒤집어지고 가슴이 싸아해지는 이야기.
홍합은 정말 재미있고도 따뜻한 소설이다.
장르? 뭘 그런 걸 따지나
이건 한창훈의 소설이다.
쓸데없이 폼잡고 먹물든 티 내는 거 아주 싫어라 하는, 정말 괜찮은 젊은 작가가 쓴 소설이다.
갈수록 읽기도 이해하기도 난감해지는 요즘 소설들.
정말 이야기는 이런 것이지 않겠는가
타이탄 트럭 짐칸에 어떤 동네 홍합공장 일가는 여인네들과 어깨 나란히 주저 앉아 뽕짝 한 소절 같이 흥얼거리며 실려가는 것 말이다.
제목 : 홍합
지은이 : 한창훈
펴낸곳 : 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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