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무어라 말을 하는 것이 몹시 어렵고 고단하다.
거리가 멀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그 거리가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섣부른 자기위로나 끓어넘치는 분기로 쳐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긴..내 하는 일이 늘 그렇지, 속없이 분개하고 넘치고 바닥없이 쳐져 뒹굴고..그게 내 본시의 얼굴이었으니 달리 어쩔 수도 없겠다.
아직도 그러한가?
아직도 대학에 갓 들어간 새내기들에게 반드시 읽어야할 책 목록을 주면서 그 목록의 맨 위쯤에 이 책이 여전히 있는가.
낙원구 행복동.. 판자촌 철거민 마을
앞의 이름과 뒤의 말은 왜 이다지도 극적으로 부딪치면서 슬픈 파열음을 가질까.
판자촌 철거민 마을에도 햇살은 있었을까.
곱추 아버지는 공장굴뚝 아래로 떨어져 죽는 일 같은 건 없이,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지켜줄 수 있었을까.
큰오빠는 집에 올 때마다 배가 부르다가 약을 먹고 죽은 첫사랑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영희는 다 자라서 수줍은 고백을 할 청년을 만날수 있었을까... 몇푼짜리 아파트 입주권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사노(私奴) 였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대부터 이어진 가난과 절망은 그 아들로, 다시 손자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추락하면서 노력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든지, 풍요로와진다든지 하는 말들은 믿을 수 없고 또 아무도 믿지 않는 낡은 광고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70년대, 도시가 급작스레 팽창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결정적으로 심해지고 그 계층이 단단히 고착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뜯겨지고 날아가버린 민들레같은 사람들.
문장은 대단히 건조하다.
단문으로 탁탁 끊어지면 철거계고장이나 아파트 입주권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하고, 소소한 물가나 경제지표가 수치로 보여진다.
그런데 신문 경제면 한쪽같은 그 문장들 사이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경제성장"의 틈바구니에 짓밟히고 깨져버린 철거민들의 피눈물이 떠오르는 것이다.
영희와 그다지 먼 거리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세상을 두보의 싯귀로나 읽던 어설픈 애상의 정조(靜調)에 빠져있던 무른 머리를 세게 후려쳐버린 소설이었다.
내년 이맘때는 아마도 내 앞으로 크지는 않지만 아파트 한 채가 생길것 같다.
공사현장을 지날때마다 키가 늘어가는 단지를 보면서 설레지 않고 어쩐지 죄지은 마음이 되어버린다.
지난 가을 겨울 내내 이 공사현장 한 구석에서는 철거민들의 처절한 농성이 있었다.
남들 보기에는 어떻든지 따뜻하고 평화롭던 보금자리를 이주비 몇 푼을 받고 쫓겨난 주민들은 그 돈을 가지고는 이미 다락같이 올라가버린 집값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백년만에 폭설이 내렸다는 지난 겨울, 그 엄혹한 추위속에서 비닐과 스티로폼으로 만든 움막에서 밤을 지새는 그들의 기사를 보면서, 나는 그토록 꿈꾸어왔던 "내 집"이 누군가의 눈물속에 올라간다는게 괴로왔다. 나 역시 언제까지 갚아야하는지도 모르는 캄캄한 융자금을 안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그들"이라고 밀어둘수만은 없던 것이, 그 동네는 대학 1학년을 보낸 추억의 한자락을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지붕이 낮은 고만고만한 집들,
보도블럭은 이가 맞지 않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좁은 골목길에 울퉁불퉁 솟아올라 틈바구니에서 삐죽삐죽 솟는 흙탕물로 옷을 버리기 일쑤였지만, 저녁나절 은은한 그 비안개를 뚫고 들려오던 하모니카소리는 아직도 그리운 한장의 사진이다.
잘난 사람들이 잘난 말로 세상을 떠들고 걱정하고 기층민중의 살이를 한탄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그들 속에서 아프고 고통스러워한 밤도 없이 떠드는 문자속의 화려한 개탄을 나는 장진구스러움으로 본다. 물론 세상을 장미빛으로만 살아가고 나 아닌 이들의 고통에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어본 적이 없는 이들도 역시 신뢰하지 않지만.
뒤적거리다보니 함부로 흘려쓴 내 덧글들이 중간중간 눈에 띈다
신문에는 부정이 드러나는 공무원은 의법 조치하겠다는 높은 사람들의 말이 자주 실렸다.
그러나 뒷집 남자는 부정이 드러나지 않았던지 까딱없었다. '부정이 드러나면' 이라는 말에는 참으로 묘한 풍자가 들어 있다.->
부정이 드러나지 않으면 처벌되지 않는다. 처벌하지 않으려면 부정을 보지 않는다
지상에 내 집 한 칸 갖는 것이 이처럼 미안하고 괴로운 일이 될 줄이야...
그게 십 년, 이십 년 전의 것이 아니고 2004년 오늘의 것이라니...
비오는 그 달동네 골목길에 두고온 어린 나와 영희가 오도카니 빗물에 젖어 나를 보고 있다...
제목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은이: 조세희
펴낸 곳: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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