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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돌말사람들

석양에 홀로 서서 4

by 소금눈물 2011. 11. 17.

 

02/09/2004 03:37 pm공개조회수 0 8




"그려, 해도 질은디 니가 한국은행이 가서 윤전기 돌리고 오는 중 알었다. 날 더운디 고생혔다."

수금은 고사하고 서 버린 오토바이를 끌고 온 철만에게 보급소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말썽을 부린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조만간에 새로 장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문 구독자가 늘 것도 없는데, 장사장마저 면사무소 지붕을 고치다 허리를 망가뜨리는 걸 보니 이래저래 속이 시끄러워 짜증이 난 것이었다.

장사장을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혹시라도 전화라도 놓칠까 싶어 서둘러 왔는데, 일찌감치 돌아와 있으리라 믿었던 철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해가 꼴딱 넘어가서야 터덜터덜 빈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났으니 울화통이 터졌다.

"신문얼 돌렸으먼 돈얼 받어와야지. 물러터져서는 가라먼 가고 담이 오라먼 또 담이 오구.. 니넘도 니넘이구 무식 깡깽이가 되어서니 시상이 워치게 돌아가넌지 케비에스 뉴스도 지대로 볼 중 몰르는 동네서 문화사업얼 허넌 내가 미친눔이다."

혼자 북북거리다가 유리문이 부서져라 처닫고 보급소장이 나갔다.

심드렁하게 서 있던 철만은, 소장이 나가자 마자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낡은 소파에서 풀썩 먼지가 올랐다.
남은 신문지 더미와 광고전단뭉치에 발을 얹고 눈을 감았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농고를 졸업하고 육 개월을 방바닥씨름을 했다.
아버지와 작대기 숨바꼭질도 어지간히 했다.
노느니 염불이라고, 애초에 논바닥에 모 꽂고 살 놈도 못된다고 한탄하던 아버지가 동생이 하는 보급소에 신문이라도 돌리라고 밀어넣은 것이었다.

한 주일도 못하고 때려치리라 믿었는데 신통하게도 일 년 가까이를 꾸벅꾸벅 다니고 있었다.
하긴 집에 있어봤자 새벽닭과 기상시간이 같은 아버지 성화에 등대고 누워있을 수도 없었고, 대처로 나간다 한들 배운 기술도 학력도 없이 철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더구나 애초에 도시로 나가서 북적대고 사는 일은 철만이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아버지 말대로 논바닥에 모 꽂고 살 위인도 아니지만 남다른 포부도 없이 하루 세끼 밥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아버지나 삼촌이 싫은 소리를 하면 잠깐 눈 감고 귀 닫고 노래 한자락 속으로 불러제끼면 될 일이었고, 밉다 한들 밥상 치울 엄마가 아니잖은가.

철만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감는 눈썹끝에 자꾸만 흰 이마가 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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