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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돌말사람들

만추 -마지막회

by 소금눈물 2011. 11. 17.

 

02/02/2004 02:55 pm공개조회수 0 2



한참을 말없이 불빛만 바라보던 엄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너 큰 엄마 자구 가던 날 생각나냐?"

"메칠이나 되었다구......."

" 아니 그 새복이 호철이 즌화 혔던 거 말여"

" 어 참. 무슨 전화여? 그 날 중말 갔다왔잖여 "

왕겨를 집어 불 속으로 던져 넣고 서너번 풍구질을 하더니

" 늬 큰엄마 오래 못 사신단다"

나는 어쩐지 들을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새벽에 황망하게 전화를 받을 때부터였다.
하룻밤 새 갑자기 살갑게 구는 엄마도 이상했고 난데없이 통 발길도 않던 은산을 다녀 온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은산이 어딘가.
당신 말대로 그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던 동네 아닌가.

" 위암이래드라. 말 들은 지는 멫 달 되었댜. 애들만 알구 쉬쉬 혔는디 어띃게 알었나 부드라. 꼬챙이 겉이 말릉 거 보구 이상허게는 생각혔지만........ 늙은이가 무단히 살 내리먼 무슨 탈이 있긴 허지 싶었는디......"

"은산이는 뭐 하러 가셨어?"

" 그냥 저냥 돌아보자구 허대. 당신 친정두 아니구 뭔 살뜰헌 곳이라구......그렁게 사람이 벨나지. 죽을 띠가 됭 게 별 간디가 다 보구 싶구. 아 아직 살어 있는 사람두 있을틴디. 나는 겁이 나서 지금두 큰 질루는 못 다니겄드라만 "

" 어딜 다녔는데?"

" 어디긴 뭐. 중말루 들어가두 못 혔어. 거게 뻔히 보이는 말랭이서 한참을 앉었다가 그냥 일어섰지"

"그럴 걸 뭐하러 가셨대"

"여긴 또 뭐하레 오셨간디. 그냥 무단히 맘이 밟히는 디가 있구 그렁 거지. 그렁게 나이들구 갈 띠 디문 다 언내 같어지는 거여. 몰래 감챠 둔 빠끔살이(소꿉놀이, 소꿉살림) 맹키루 잘 있나, 나 웂는 새 누가 집어 갔나 싶게......."

"나오는 질이 보문 잠깐이지. 사는 게 잠깐이여. 어뜨케 그 무선 세월을 살었는지......."

그리고는 둘 다 말을 잊었다.
엄마는 이따금씩 왕겨를 한 줌씩 집어 아궁이 안에 던져넣었고 나도 무릎에 턱을 올리고 앉은 채 줍지 않은 쌀튀밥이 까맣게 숯이 되는 걸 묵묵히 바라보았다.

밥 물이 솥 뚜껑 아래로 쭈르르 미끌어졌다.
솥뚜껑을 열어 밥 물 넘치는 걸 보고 엄마는 끙 소리를 내며 닫고는 행주로 솥 가를 훔쳐닦았다.

삼돌이가 부엌문을 디밀고 들어왔다.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달려들다가 털을 부르르 떨었다. 개털 묻을 까봐 질색을 하고 걷어차다가 나는 삼돌이 등이 젖은 것을 알았다.

그런데 불빛에 반짝이는 것은 그냥 물기가 아니었다.
손바닥을 들여다보는데 불을 켜던 엄마가 등을 두드렸다.

" 들어가서 옷 갈아 입어. 저녁 먹으야지"

부엌 문을 열고 나오던 나는 순간 눈을 감았다 떳다.
마당이 그새 달빛이 내린 것처럼 환했다.
아랫집 봉창문이 발그스름하게 꽃을 피웠는데 어둑어둑한 담장 아래와는 달리 슬레이트 지붕과 삼돌이 발자국이 이리 저리 흩어진 마당에는 싸래기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 엄마 눈 와! 첫 눈이여!"

고개를 내밀고 흐뭇하게 눈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등짝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 아이구 이 웬수. 올 해도 그냥 지나간다 내가 못 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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