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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돌말사람들

만추 1

by 소금눈물 2011. 11. 17.

 

01/17/2004 07:43 pm공개조회수 0 3



추분 지난 지가 달포나 되었으니 선듯해질 때도 되었건만 늦더위는 가실 줄을 몰랐다.
농사짓는 마음들이야 가을 볕 한나절이 아쉽기는 했지만 여름내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도 늦게 닥친 태풍이 다 쓸어가 버려 거둘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가을이 한창인데 한여름처럼 찌는 낮더위가 마냥 고마울 일이 아니었다.

하기야 손바닥만한 논다랭이 몇 마지기에 마당 끝 텃밭 가꾸는 게 전부인 우리 집 처지에 농사 운운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푸성귀며 김장양념은 서운하지 않게 거두던 터라 온통 쓸어갈 듯 퍼붓는 태풍엔 망연하기도 했다.
그것도 벌써 한참 전이고 바심까지 마치고 콩대를 터는 것으로 가을걷이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한숨 쉬고 모레쯤에나 콩바심 하고 밭고랑 정리를 하자는 걸 오늘 저녁이 아버지 제사라고 번잡스럽다고 기어이 엄마는 밭에 나가선 아침나절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심심풀이로 심은 콩이 얼마나 하겠냐고 나가더니 한나절을 꼼짝도 않고 밭에 있었다.

철 지나 시나브로 시들어가는 익모초며 마른 가지 대궁이 따위를 거두어 밭고랑에서 태우고 있는 지 한참 전부터 맵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기가 아깝다고 일찌감치 선풍기를 들여 넣은 터라 부채만 화닥거리며 라디오 다이얼만 이리저리 뒤적거리는데 대문간이 어수선했다..

" 이년아 집이서 뒹굴라먼 즘심이나 허지. 장승겉이 허우대만 멀쩡혀갖구 일 허다 들어온 늙은 엄니가 즘심까지 히다 바치야겄냐?

머릿수건을 벗어 탁탁 털며 얼굴 찌그리는 소리부터 나오는 걸 못 들은 척 하는데 따라들어오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고운 옥색 한복에 발그스름하게 화색이 도는 얼굴. 큰 엄마였다.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꼭꼭 누르며 보얀 손으로 휘휘 저었다.

" 아이구 참 무슨 더우가 이랴. 부지런한 집이는 바심두 허든디 아주 삶네 삶어 "

엉거주춤 일어나서 꾸벅 인사 시늉만 하는 내게 손을 저으며 끙 하고 마루 끝에 걸터 앉았다.

" 아이 호봉이 있었구나. 너 인저는 밖이서 보먼 통 모르겄다야. 벌써 한 십 년디여간다이. 호철이 혼삿날 보구 츰이구만. 앗따 발두 읎는 세월이 빨리두 간다"

샘물을 길어 대야에 쏟아붓던 엄마가 목에 두른 수건을 벗어 옷자락을 탁탁 쳤다.
땀과 먼지로 번들거리는 눈이 한층 더 꼿꼿한 것이 벌써 한바탕 치른 표정이었다.

" 업쎄. 절루 즘 가서 털어. 탑세기 날리네 그려 "

엄마는 대꾸도 않고 푸푸거리며 세수를 했다.
얼굴에 닿는 물보다 마당가에 흩뿌리는 물이 더 많을 듯 싶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마당으로 내려가 엄마가 가져온 갈퀴와 낫을 잿간에 갖다 놓았다.

마루에선 얼굴을 닦는 엄마와 칠십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고운 태가 있는 큰 엄마가 나란히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큰 엄마가 나이가 위일 텐데도 나란히 두고 보면 엄마는 고생에 찌든 맏이 얼굴이고 큰 엄마는 재롱만 부리다 나이가 든 막내 같았다.

" 콩 다 털었어?"

" 털구 말구 헐 것두 읎어. 심 스방네 염생이가 오구 갈 적마다 핥어대쌌는디 남을 것이 있겄냐?
지 짐승 귀헌 중만 알지. 볼 때마다 적성을 밭쳐두 끄떡두 않드만 남을 것이 있겄냐? 가을 일 벅찰까봐 도와줄라구 허는 갑다. 아이구 박 스방인가 말두 드럽게 안들어."

피씩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아버지나 이 쪽 친척을 욕할 때마다 올리는 것이 아이구 박 스방인가 였다.

십 년 전 사촌오빠 결혼식에서 보고 처음이니 반가움이 앞서야 할 것 같은데 엄마 얼굴이 영 아니었다.
잔뜩 볼이 부어서 내내 퉁퉁거리고만 있는 엄마나, 누구 욕하는지 아나 모르나 평생 진 일 한번 해 보았을 것 같지 않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으며 기웃대는 큰 엄마나 영 반가운 그림이 아니었다.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는 동서지간인 것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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