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부신 달밤이었다.
달빛은 흰 천을 깔아놓은 것처럼 뿌옇게 빛났고 사방은 고요했다. 이따금 정적을 깨는 찻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가고...그리고 다시 세상은 정적에 잠겨들었다.
물소리가 흐르는 곳을 따라 내려갔다. 논밭쪽이었다. 밤공기는 사정없이 매웠다. 일찍 마신 술을 깨려고 냇물에 손이라도 담가볼 생각이었다. 마른 물이 졸졸 흘러가는 냇가쪽으로 발을 옮길 때였다.
나즈막한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벚나무 뒤로 몸을 가렸다.
나는 나무에서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낮에 본 그들이었다.
냇가에 앉아서 물을 들여다 보는 듯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남자는 안타까운 듯이 몇 마디 더 던졌다. 조용한 이야기가 끊어질듯 이어졌다.
교교한 달빛이 사정없이 그들 어깨로 부어지고 있었다. 돌린 여자 어깨로 출렁 머리채가 흘렀고 여자를 돌아보는 남자의 턱선이 단단했다. 몇살이나 되었을까. 스무 남짓한 여자와 서른이 안되었을 것 같은 청년이었다.
그때...바람이 화르르 일었다. 내가 서 있던 벚나무가 조금 흔들렸다.
그러면서 일찍 피었던 벚꽃이 순간....비처럼 그들 어깨 위로 날아내렸다. 꽃 비....부신 달빛 아래로 흐르는 꽃비의 물결...몇은 여자의 이맛전으로 떨어졌고 또 몇 잎은 남자의 어깨로 흘러갔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이제 침묵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진듯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숨막힐 것 같은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나무 뒤에서 발을 떼지도 못하고 나는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고...날리던 꽃잎 몇이 내 얼굴을 스쳐갔다.
(<늦은비> 중.. 소금눈물)

환한 달밤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물소리처럼, 이따금 구름이 가렸던 달빛이 출렁 흔들리면 그 달빛에 만개한 매화는 꽃바다를 이룹니다.
물소리에 이따금 밤새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두 사람은 오래 말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기로 조종사관의 자존심을 다치게 한 옥이가 부상을 당했군요.
팔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아까울 것 없던 마음으로 달려간 옥이였지만, 그 마음으로 지키려 했던 이 사람 앞에서는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여인입니다.

치료해주는 손끝이 아플까봐 조심스러운 종사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해도 통증이 버거운 옥이입니다.


아프냐..
짧고 빠른 한 마디.단호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 한마디. 그런데 감정을 애써 억누른 것처럼 낮고, 차갑게 들립니다. 다친 옥이를 걱정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이제 처음 드러내는 이 음성, 아마도 윤은 비로소 자기의 마음을 처음 확인하고 스스로도 놀란 것 같습니다.

예...
봄밤이라고는 하지만 한기가 맨살에 닿아 오소소 소름이 돋습니다.
떨리는 것은 이 추위 때문일까요. 상처의 고통 때문일까요. 그것 뿐일까요..

나도 아프다
한 층 더 낮아진, 그러나 부드럽고....좀은 슬퍼진 목소립니다. 거기서 만난 너,......나는 가슴이 철렁했다.너를 옆에 둔 것이 네게 이런 위해로 다가 올 줄 몰랐다. 나를 위해, 내 꿈을 위해 네 팔을 바칠 마음......그럴 상황..나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앞에 아프냐가 겉으로라도 아끼는 수하를 걱정하는 종사관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나도 아프다는 이제 확연한 정인의 목소리가 됩니다. 나도 아프다라니요. 네가 다쳐서 마음이 아프다, ..가 아니라....그 존재자체가 아파지는 겁니다. 그 사람의 처지나 상처, 흔히 갖는 육신이나 정신의 어떤 부분이 슬프고 괴로와 아픈게 아니라, 그 실체, 존재 자체가 내겐, 전부 연민으로 다가와 그로 인해 내가 아파진 겁니다.



몰랐을까요.
모르지 않았지요. 아니 서로가 모른 척 해야 했지요.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내 얼굴보다 상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비춰온 두 사람은 그렇게 걸어온 십 오년동안, 보이는 모습보다 보아야 하는 모습만으로 자신을 닫아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을 듣고도 옥이의 얼굴은 별반 흔들리거나 놀란 모습이 아닙니다.
압니다. 나으리.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 미천한 것이 아프면 이 아픔보다 더 먼저 아프고 괴로왔던 당신, 그래서 그 고통으로 이 몸이 더 아팠던 것을 당신도 모르시지 않겠지요...

넌 내 수하이기 이전에 누이나 다름없다.
날 아프게 하지 마라







옥이의 위로와 고백이 이어집니다. 나으리...그럴 수는 없습니다.나으리를 모신지 십 오년, 지나오신 그 고통의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앞길에 목을 바칠 수는 있어도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옥이는 그렇지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서러움과 원망보다 먼저 윤을 향한 기도와 염려가 먼저 자신을 묶어버렸습니다. 천지가 붙어버린 듯 막막하고 두렵던 그 날,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존재를 안아준 윤에게 옥은 삶의 기둥이 되고 그 전부가 되게 합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나를 알아주고, 나도 아는 저 이, 저 사람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그런데 팔 하나로 그의 장도를 막을 순 없었겠지요.
그래서 채옥의 목소리는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그토록 평안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겁니다. 부상의 고통보다 그의 앞길을 지켜냈다는 안도, 내가 아프다는 말에 같이 아픈 그의 말을 차마 받을 수는 없지만, 내가 아픈데 그가 아픈 저 마음.....그 따뜻함과 기꺼움이 사랑임을 아는 옥이.
옥이의 보호자이자 치료자였던 종사관은 이 말을 받는 순간, 반대로 옥이의 사랑으로 수호받는 피보호자가 되는 군요.
종사관의 흐린 고백에 비해 옥이의 말은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누이로 말하는 마음과, 목을 바치겠다는 토로... 참으로 당돌하고도 절절한 고백이지요.
불행한 처지의 신분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자기의 삶의 방향을 찾아내고 역경을 이겨내며 살았던 여인. 그 삶의 기둥이 사랑이었다 해도 참 멋진 여인이었습니다. 사극에서 이만한 여인네의 목소리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그토록 오래 이 울림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이겠지요.

너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내 꿈을 이루고 싶은 맘은 없다....
그렇군요. 비로소 다모의 전편을 꿰뚫어버린 이 말이 나옵니다.윤을 위해 옥은 희생을 하고, 그러나 그 희생으로 인해 윤은 꿈을 이루기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이미 옥을 희생해야 한다면 윤의 꿈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옥의 사랑도, 거부도, 변심도.....모두 윤의 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모의 자리는 옥이의 선택이 아니었지요. 다모로 데려갔다고 원망하고 윤을 비난하는 이도 있었지만, 옥이는 어땠나요, 절간 공양주보다, 다른 관가의 노역보다 쉽지 않을거란 윤의 말에 미소를 짓지요. 도련님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그렇습니다. 윤의 옆이 자신도 모르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한 발 나아갈 길에서 두 발을 먼저 뛰는 성급함, 모든 일에 목숨을 던지며 뛰어드는 그 무모함....그것은 윤을 위한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그렇게 해서 밖에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보일 수 없지요. 언제나 목숨을 던지며 자기확인을 해 주어야 하는 옥이의 고통이 어땠을까요. 아마는 스스로는 고통인 줄 짐작을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확인의 방법이 거부당하는 순간 고통이 됩니다.
사주전 패거리를 막다가 무모한 대결이 벌어져 윤에게 꾸짖음을 받자 옥이는 강렬하게 반발을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그게 사랑의 유일한 표현방법인데 거부를 당한 거니까요.









그러나 윤의 마음 또한 마찬가집니다. 윤에게 옥은 이미 존재이윱니다. 옥이를 잃고 난 그의 생은 (벌써 그렇게까지 생각이 뻗지 않았지만 아직 옥은 생명을 잃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으니, 옥이의 실존이 아플 뿐이지 목숨을 걸만한 말은 아직 할 수가 없지만)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에게, 옥이는 아픈 상처의 이력을 서로 공유하고, 타인들은 아무도 짐작못할 마음의 우물을 같이 갖고 있으며 훌륭한 수하를 아끼는 상사의 마음...그게 전부는 아닌겁니다.
아마 그랬다면, 옥이에게 직접 금창약을 발라줄 수도 없고 (살붙이도 속살을 드러낼 수 없었을 그 때, 거리낌없이 저고리 밑 살을 보여주고 또 치료해 줄 수 있는...!) 그 여자의 상처를 온 존재로 아파할 수도 없었겠지요.


불행하게도.....
이 두사람은 앞으로의 두 사람의 삶의 비극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자신의 목을 바칠지언정 그의 장도를 막지는 않겠다던 그 다짐으로 그녀는 그의 사랑을 돌이질 해야 했고, 자신의 꿈이 그녀의 희생 위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이 사람은....결국....그의 일생을 던져서 그녀를....지켜야 했습니다....


달빛이 강물처럼 흐르던 이 매화원의 밤은 그들의 일생에 가장 아름답고 뜨겁던 사랑의 고백으로, 그 사랑의 지성소로 남겠지요.
유년을 함께 해 온 오누이같던 두 사람의 정이 비로소 오래 키워온 연모와 상대에 대한 연민으로 흐르게 되는 문이기도 하구요.




달빛은 매화꽃가지로 쏟아지고, 꽃빛으로 물든 두 사람의 그림자는 한없이 아름답고 따뜻합니다.

도련님과 함께 걷는 이 밤은 꿈결처럼 그녀에게 새겨지고...서로의 곁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던 그 삶의 나날이 오늘밤의 추억으로 더욱 충만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산책을 다 마치고 먼 그 나라로 떠난 후에도.

누군가는,
아주 오래도록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새기고... 또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그들을 아주 많이...사랑했다고... 그 사랑을 전설로 기록했다고 말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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