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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임정수립 기념일

by 소금눈물 2011. 11. 13.

04/13/2005 01:21 pm비공개조회수 0 3



조직적 동원 ‘일본군 성노예’ 못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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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예 사냥꾼”

위안부 동원부장 증언

1991년은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된 원년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특히 가해자들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이들의 고백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전쟁 당시 일본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치의 고백은 이렇다. “나는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 6천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 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개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에 보내졌다. 종군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 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 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리고 아이 떼놓고 억지로 트럭에…”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는 한 끝이 없었다. 패잔병이 된 일본군은 이들을 현지에 내팽개쳤다. 집단으로 학살한 경우도 있다. 어렵사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평생 수치심에 억눌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피해자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의 가혹한 피해자다. 끔찍한 기억과 병마에 시달리며 지금도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김정인 교수


조직적 동원 ‘일본군 성노예’ 못박아

‘정신대 할머니’도 ‘종군위안부’도 아니다. 일제가 강제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은 아시아 여성피해자를 일컫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또는 ‘일본군 성노예’가 정확하다. 이 개념을 구분해 쓰는 것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의 문제다.

한중일 공동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 집필위원인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일본은 ‘근로동원’된 본국과 식민지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정신대, 또는 자발성을 강조하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해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특히 작은 따옴표를 붙인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기가 가장 적절하다고 말한다. 일본정부와 군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 피해자들의 행위가 ‘자발적 위안’이 결코 아니었음을 밝힌다는 의미다.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생생하게 드러낸 사상 첫 역사교과서다. 관련 실태 및 사례와 함께 이런 비극을 극복하려는 전후 여성운동의 활약까지 모두 7쪽에 걸쳐 상세히 설명한다. 한국·중국 여성 피해자들은 물론 당시 ‘군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인들의 생생한 증언까지 함께 실었다.

한중일의 현행 역사교과서 가운데 이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 그나마 두세 문장 정도로 일본군 위안부의 비극을 소개한 한국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가장 ‘충실’한 편이다.

문제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다. 중국의 초급중학교용 <중국역사> 교과서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서술이 없다. 일본군이 저지른 부녀자 강간 등에 대한 서술만 있을 뿐이다. 양미강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위원장은 “중국에서는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이 문제를 조사·연구하는 연구소가 생기는 등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관심이 한국보다 늦게 시작됐다”고 전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서술로 가득 차 있다. 후소사판 교과서는 “(전쟁으로 인해)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징용이 행해지고 …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고 적었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표준’으로 평가되는 도쿄서적판 교과서도 “노동력이 부족해 여성과 학생들의 노동력을 동원했다. … 외국인도 강제 연행했다. 이들은 광산과 공장에 동원됐으며, 이 과정에서 여성과 아이들도 희생됐다”고 서술한다. 외국인 여성의 ‘희생’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소개하지 않는다.

<미래를 여는 역사>가 서술하는 그 실체는 이렇다. “일본군은 전투력을 높이고 사기저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침략당한 국가의 부녀에 대한 군인들의 강간행위를 용인”했고, “일본군인들은 강간 행위가 헌병에게 발견돼 조사받을까 우려해 피해 부녀 대부분을 살해”했다. 일본은 1931년 중국 상하이 홍등가에 해군 특별 ‘위안소’를 만들고 이후 점령지역 곳곳으로 확산시켰다. “위안소의 설치·관리·통제는 일본군이 담당”했고, “일본 외무성·내무성·조선총독부·대만총독부 등의 국가기구가 위안부를 이송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동북아 세 나라가 그 과거를 분명히 인식하는 일에 주저하는 동안, <미래를 여는 역사>는 일본 정부가 체계적·조직적으로 주도한 ‘전쟁범죄’를 낱낱이 적었다. 그 상처를 분명히 서술하고 함께 공유하는 일 없이,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게 <미래를 여는 역사>의 뜻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세계사 유례없는 ‘전쟁범죄’

90년대 유엔에 인권문제 제기
일, 실체 부정 사과·배상 외면
“공창” “공동변소” 제2의 폭력도


△김정인/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심각한 인권침해사건이다. 일본 정부 및 군대가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 군인들의 성노예로 이용한 이 사건은 국제법상 ‘인도주의에 반한 죄’이자 ‘전쟁범죄’다. 그러나 전후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법정은 책임자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광범위한 증거는 묻혀지거나 은폐됐다.

피해 여성들의 고통과 한서린 기억으로만 이어지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국제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90년대다.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고백했다. 최초의 ‘위안부’ 피해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어 여성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 이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기하면서 국제적 쟁점이 됐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전쟁 당시 일본 정부의 위안소 설치가 국제법 위반이라며, 진상 규명과 사죄, 피해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거듭 권고했다. 2000년 12월 도쿄에서는 민간국제법정인 ‘일본군성노예 전범 국제여성법정’이 열렸다. 한국·중국·일본 등 모두 9개 나라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이 법정에서 판사들은 유엔의 권고사항에 덧붙여 당시 천황인 히로히토에게 강간과 성노예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극히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문제가 국제적 쟁점으로 떠오르자, 1992년과 1993년에 형식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해 결과를 발표했다. 관방장관은 우회적으로 사과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취한 공식 대응의 전부다. 중일평화조약,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한일협정 등을 통해 배상 문제가 모두 해소됐다며 배상과 책임자 처벌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 정부는 교묘한 편법을 선택했다. 1995년 민간모금과 국가재정 지원의 형식을 통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마련했다. 겉으로는 배상책임이 없다면서도, 민간을 통해 ‘도의적’인 책임에 따른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민간창구를 빌린 위로금 지급으로 이 문제의 종결을 시도한 ‘편법’은 한국·중국 피해 여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가해자의 폭력은 민간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웅변한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의 경우, 일본 정부와 군이 주도한 이 문제의 본질을 아예 부정한다. 당시 일본 정부가 여성을 강제로 전장에 끌고 간 적이 없고, 위안소는 민간 ‘업자’가 운영했다는 것이다. 위안부제도가 공창제의 하나였다는 망언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소속의 사카모토 다카오 일본 학습원 교수는 “위안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화장실 구조에 관한 역사를 쓰는 것과 같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 남성들은 성매매 여성을 ‘공동변소’라는 속어로 부른다. 바로 이런 일들이 돈으로 피해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시도가 동아시아 평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다.

계속되는 일본의 ‘폭력’ 앞에서 고령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통스럽게 세상을 뜨고 있다. 한국에서는 피해 등록자 중 40%가 이미 사망했다. 지난 2월에는 중국 여성 피해자 중 최고령자였던 주차오메이가 96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정의로 보상받는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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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일본이라 치자.
그 망할 족속들은 어차피 철면피, 부끄러움도 모르는 그따위 소설로 자식새끼들이 나중에 어떤 돌을 맞으며 떠돌게 될지 모르는 하이에나 같은 것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개잡놈들.
저보다 힘센 나라에는 그 소설에 찬양까지 덧붙여서 갖다 바치는 쓸개 빠진 머저리들.
빌어먹고 떠돌다가 발길에 채여서 사지가 찢어져 나부낄 저주받을 것들.
두고두고 동정받지 못할 쓰레기들.


그 쓰레기들에 빌붙어 제 동족에 칼을 겨누고 피를 빨아먹은 것들.
그 뱀의 자식들.
저 가엾은 흰 옷의 누이를 모욕하고 짓밟으며 그 피로 두고두고 호의호식한 승냥이들.
부끄러운 과거를 과거의 영광으로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이 선한 땅의 지킴이들에게 덮어씌우고 그 피를 낸 늑대같은 것들.
대를 이어 거머리 노릇을 한 추악한 쥐새끼들.

너희 사는 나날, 두고 두고 피로 지나간 그날의 울음, 그 목소리로 기억하리라 다짐하며.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86주년 기념일.
부끄러운 오늘의 후손...
청산되지 못한 친일, 반민족의 역사를 가슴아파하며
고개를 숙여 선열들께 눈물로 감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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