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길에 서서
5.18민주화묘역에서- 꽃이 된 사람들, 꽃이 된 광주
by 소금눈물
2011. 11. 13.
03/11/2009 09:42 am공개조회수 0
이 포스트는 아주 슬픈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짐작이 되실 터이니 마음에 부담 갖고 싶지 않은 분은 여기서 그만 나가셔도 좋아요. 하지만 꼭 봐주십사고, 되도록이면 광주가 아닌 다른 고장에서 태어나시고 거기서 살고 계신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싶지만, 그래서 알기도 전에 식상하고 지친다 싶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어차피 말재주도 없는 사람이고 새삼 커다란 다큐멘터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어느 봄날 찾아갔던 그 언덕, 이젠 마른 풀이 바람이 흔들리던 쓸쓸한 산자락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잘 포장된, 슬픔도 그 벽돌 아래 생경스럽게 갇혀있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니까요.
'남도여행을 다니면서 들르지 못해 부채감으로 남아있던 광주'라고 했었지요. 80년대를 지나온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마도 광주라는 지명이 이 나라 한 고장의 행정구역일 수만은 없을 겁니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라던 시도 있었지요. 그랬습니다. 광주는 피에 물든 꺾여진 꽃잎의 이름이었고 찢어져 묻힌 태극기의 모습이었습니다.
학교다닐 때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 근처서 어른거린 적도 없이 무심하고 속편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지만 저도'광주'라는 이름을 들을 땐 어쩐지 함부로말할 수 없고 광주의 사람들에게 늘 미안하고 가슴 아팠습니다. 광주는 우리 가슴에 박힌 커다란 사금파리였지요. 외부사람들이 이런 부채감을 갖고 있을 때, 그 모진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당하고 있고, 아마도 그 이력을 한동안 더 가질 지도 모르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이 일은어떤 의미였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지요.
가 보마, 가 보마 하면서 바쁜 일정을 핑계로 지나치기만 하고, 그렇게 늘 미안했던 광주.
그래서 오늘은 꼭 마음먹고 들르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이곳이 성역화 되기 전에 다녀간 적은 있지만, 마침 함께 간 일행이 초행이라 더더욱 뜻이 깊었구요.

전에 찾아왔을 때는 황량한 언덕에 봉분만 나지막히 있던산모롱이 였는데 그새 이렇게 새로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있더군요.
입구에서 안내해주시는 분이, 외지에서 왔다니까 내부 안내를 해주시겠다 하십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고 싶지만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식사하셔야 할 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고 또 우리도 일정이 급해서 마음이 바쁩니다.
아쉬워하시면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단 열흘간에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무고한 시민이 어떻게 학살을 당했는지, 그나마 유골도 찾지 못하고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분들의 사연을 들으며 참으려고 해도 쉴 새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돌아서서 자꾸 눈가를 찍기는데 담담한 이 분은 이런 외지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셨을까요...
사상자와 행방불명되신 분의 수를 들으면서 내내 우느라 다 기억을 못해, 돌아와서 자료를 찾다보니 이런 포스트가 있더군요.
http://blog.daum.net/maehwa2010/718580?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maehwa2010%2F718580
자료를 찾으며, 마음을 다시 추스리느라 글이 자꾸 늦어집니다.

유영봉안소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위폐를 모시고 있습니다. 환기조절을 그렇게 했겠지만 유난히 서늘한 방이어서 어깨가 움츠러들었습니다.
전면 가득 들어선흑백사진속의 얼굴들. 가슴이 턱 막혀옵니다.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 자꾸 시야는 뿌얘지는데 조심조심 셔터를 눌렀습니다.

이곳은 그날의 상흔으로 고통을 겪으시는 분들이 돌아가신 후 자리를 채울 곳이라 합니다. 아직도 광주는 현재진행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30년 전의 일이다. 잊힐만 하지 않느냐..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빈자리로 그분들을 기다리는 '내일'을 보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겠지요.


북괴공산당의 사주로 벌어진 빨갱이들의 준동이었다고 거품무는 사람들 봐주세요. 이 어린 소년의 어디에, 저 초로의 노인 어디에, 저 단정하고 고요한 신사의 어디에 그런 모습이 보이나요? 사망일자가 정확히 적히지 않고 '행불일자 1950년 5월'로만 남은 저 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사진속의 아기 역시 행방불명이지요. 평화로운 오월의 도시, 초파일 연등이 걸리고 전국체전 잔치를 준비하던 도시에서, 어느날 들이닥친 탱크와 기관총탄의 난사속에 엄마의 손을 잃고 사라져버린 아기, 시신도 찾지 못하고 훗날 가족들의 피어린 오열 속에서 그날 그 현장의 마지막 모습으로 여기에 자리잡은 아가...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교복을 입은 채로 거리에 나왔다가, 퇴근하던 길거리에서 그렇게 휩쓸려 사라진 사람들...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가슴에 저립니다. 모습도 남기지 못한 슬픈 영가는 무궁화꽃이 되었습니다.

박금희.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다지요. 5월 21일 그 날, 갈래머리 곱게 빗은 이 여학생은 폭도가 아니었습니다. 난데없이 쏟아져들어온 이 나라의 군인들, 국가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총탄속에서 시민들이 쓰러져 아비규환이 된 그 날, 헌혈을 하고 나오던 기독병원 앞에서 그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먼 하늘을 보는, 희디 흰 교복 칼라의 동그랗고 맑은 얼굴. 그날 광주의 얼굴이 저랬을까요. 한없이 맑고 슬픈 눈으로 먼 하늘을 보던 저 소녀의 꿈은 누가 가져가버린 걸까요.

힘든 발걸음을 떼어 봉안소를 나와 그분들이 잠들어계신 곳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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