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에서는 산들이 적어, 소리는 되돌아 오지 못하고 그저 사라질 따름이다.
아무리 크게 내질러도 결국은 중앙 아시아의 한도 없이 넓은 들판 속에서 사라질 소리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러시아 민요를 빌면, 내 죽음으로도 메우지 못할 들판을 그곳 사람들은 소리로 메운다.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을 소리로.
-김현 전집 14. <사라짐과 맺힘> 중
그대...
그대..
가을이 깊었습니다.
지난밤 창문을 흔들던 비바람도 이제 그치고 아파트 화단의 과꽃도 목을 외로 꺾고 있습니다.
어제는 비가 올 줄도 모르고 베란다 창문을 물걸레로 닦았습니다.
지난 봄, 여름의 먼지들이 시커멓게 묻어나왔습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저렇게 얇은 유리막이 하나 있어, 제가 고스란히 받았을 바람을 막아주고 견뎌주었던 것이 있었던 듯 합니다.
아마도..그것은, 그 짧은 날들의 이야기 아니었을까요.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견디게 하는, 이 캄캄한 날들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약속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가진 가난한 재산은 당신 뿐이었군요.
당신의 미소도, 건반이 몇 개쯤 내려간 듯 낮은 저음으로 부드럽던 당신의 말투도 이제는 희미합니다.
사전을 넘기다가 문득 시선이 부딪쳤을때 슬쩍 웃던 그 따뜻한 웃음도, 캄캄한 복도에서 지나칠때 살짝 일던 그 스킨냄새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절절하고 가슴 아픈 추억이라도 시간의 무게에는 속절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생각하는 것은 사막만년청이나 사막의 새우알보다 더 아득하고 무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그리움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부르는 이 소리가, 그 아득한 평원으로 그저 사라져 아무 반향도 흔적도 되지 못하는 그 "사라짐"이 되고 말지라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부름"이지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고백이 아니니까요.
이제 이 지루하고 낡은 회상도 어느덧 끝에 다다랐습니다.
처음, 댐이 만든 호수가 가까운 이 낡은 아파트로 이사온 봄날, 저는 그저 막막한 외로움과 끝도 없는 침잔의 나날이었습니다.
지난 봄과 여름.. 그리고 깊어가는 가을 사이 당신은 그렇게 아픈 내게 가만히 찾아왔지요.
불쑥불쑥 일어서는 목울대를 막는 아픔과 괴로움 사이에서, 당신과 주고 받은 것이 아픈 추억, 고통스런 이별만은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처음 본 저녁의 그 떨리는 마음만큼, 헤어지던 날의 그 무서운 바람결 또한 고마운 추억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렇게...조금씩 잊어가고 외로와지면서, 문득 문득 그립고 아프면서 따뜻하게 당신을 추억할 날이 있겠지요. 당신도..그렇게 제가 호흡하는 한줌의 따뜻한 공기였던 것을요.
아까부터 조금씩 다시 바람이 붑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바람결에 비냄새가 묻어 있습니다.
비가 오고..또 그치고 나면 가을은 한층 더 깊은 속으로 성큼 들어서겠지요.
당신과 처음 마주보던 그 산길, 무릎까지 낙엽이 쌓이고..기울인 당신의 어깨 위로 비처럼 흩날리던 나뭇잎이 생각납니다.
이제 다시는 가지 못하겠지요.
그날의 서럽도록 그리운 추억은 그 숲에 묻어두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겠지요.
안녕..
고마웠던 사람..
차마 잊지 못할 내 그리움의 모든 우편 엽서 안녕.
이제서야 비로소 당신을 보내며, 당신을 잊으며 따뜻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득히 먼 안개와 그림자의 사람들.
원무...주영...
이렇게 지금은 당신과 헤어져도, 당신이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믿으며 그때까지 제 긴 그리움을 아득한 사막으로 끊임없이 흘려야 하겠지요.
당신을 잊어가는 새, 내 안의 새우알은 깊디 깊은 모래속으로 점점 더 가라앉아가며 어느날 내릴지 모르는 그 한줄기 빗방울을 생각하며 눈을 감겠지요.
비가 그치면 댐에 나가봐야겠어요.
호수에 비친 물그림자가 이때쯤 참 아름다울겁니다.
가을 산을 함뿍 담은 호수를 보며 여름내 끼인 먼지를 씻을 생각입니다.
고마왔어요..
안녕...
이렇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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