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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이미지소설

21. 사랑은 다시 오리라.

by 소금눈물 2011. 11. 11.

09/06/2004 07:42 am



중앙 아시아에서는 산들이 적어, 소리는 되돌아 오지 못하고 그저 사라질 따름이다.
아무리 크게 내질러도 결국은 중앙 아시아의 한도 없이 넓은 들판 속에서 사라질 소리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러시아 민요를 빌면, 내 죽음으로도 메우지 못할 들판을 그곳 사람들은 소리로 메운다.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을 소리로.

-김현 전집 14. <사라짐과 맺힘> 중


가을이 깊었습니다.

여름내 창문을 흔들던 비바람도 이제 그치고 아파트 화단의 과꽃도 목을 외로 꺾고 있습니다.
오늘은 베란다 창문을 물걸레로 닦았습니다.
지난 봄, 여름의 먼지들이 시커멓게 묻어나왔습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저렇게 얇은 유리막이 하나 있어, 제가 고스란히 받았을 바람을 막아주고 견뎌주었던 것이 있었던 듯 합니다.
아마도..그것은, 그 짧은 날들의 이야기 아니었을까요.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견디게 하는, 이 캄캄한 날들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약속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이 지루하고 낡은 회상도 어느덧 끝에 다다랐습니다.
처음, 댐이 만든 호수가 가까운 이 낡은 아파트로 이사온 봄날, 저는 그저 막막한 외로움과 끝도 없는 침잔의 나날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가난한 재산은 당신 뿐이었군요.
당신의 미소도, 건반이 몇 개쯤 내려간 듯 낮은 저음으로 부드럽던 당신의 말투도 이제는 희미합니다.
사전을 넘기다가 문득 시선이 부딪쳤을때 슬쩍 웃던 그 따뜻한 웃음도, 캄캄한 복도에서 지나칠때 살짝 일던 그 스킨냄새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절절하고 가슴 아픈 추억이라도 시간의 무게에는 속절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을 생각하는 것은 사막만년청이나 사막의 새우알보다 더 아득하고 무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그리움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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