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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풍죽도

18. 화표주

by 소금눈물 2011. 11. 11.

 

12/24/2010 03:01 pm공개조회수 0 0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짐승처럼 소리치던 거친 목소리였다.

목구멍 안에서는 맴돌고 있는 말들이 아니라 밖으로 터지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신음이었다.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정신 놓으면 얼어 죽는다!"


가까스로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횃불 아래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는 병방이었다.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일어선다고 몸을 펴다 나도 모르게 밭은 비명이 터졌다.

병방이 다급하게 다가와 몸을 살폈다.

허벅지 아래 디밀던 손을 불에 비춰보는데 흥건히 피에 젖었다.

바위 아래로 떨어지면서 튀어나온 무엇에 살이 찢긴 것 같았다.

이승필이 황급히 여기저기를 뒤졌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괜찮습니다. 그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말을 떼었다.

병방은 혀를 차며 화를 냈다.


"불맞은 곰처럼 미친 듯이 빨리 달리기만 하면, 이기는 싸움인 줄 알았더냐?

네 놈 때문에 다 져버렸다. 이미 승부는 다 끝난 것이니 무사히 산을 내려갈 생각이나 하여라."


"어떻게 병방께서・・・・・・?"


"도중에 무리를 잃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쓸만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허릅숭이였던 놈을・・・"


정신이 들자 추위가 찾아왔다.

정신없이 덜덜 떨렸다.

몸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지는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렸다.


"안 되겠다. 이렇게 어두운데다 골이 깊으니 우리를 찾으러 나선 이들도 길이 어려울 것이다. 도착할 때까지 불이라도 피우고 있어야지 이러다 탈이 나겠구나."


낙엽을 그러모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바로 눕히고 병방은 삭정이가지를 찾았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무서리를 얹기 시작한 낙엽 때문에 몸은 더 차가웠다.


다시 혼곤해졌다.

짐승의 혀처럼 일렁이는 횃불을 보며 풀어지는 의식을 다잡아보려 애를 쓰다 또 정신을 잃었다 깨었다를 몇 번을 반복했던가.


화톳불에 몸이 녹으면서 편안해졌나보다.

머리통이 짓이겨지는 듯한 두통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무둥치에 기대 졸고 있는 병방을 보았다.

내가 움직이자 잠이 덜 깬 머리를 흔들며 병방이 하품을 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느냐?"


"예・・・・・・"


"아무래도 허벅지가 찢긴 것 같다. 뼈가 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의원이 보아야 알 일이고."


불더미 속에 허리를 세우고 있던 장작이 타며 툭 무너져 내렸다.

두 사람의 눈길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화톳불을 보며 말이 끊겼다.


쏟아지던 피가 멈춰있었다.

흰 무명천이 허벅지를 친친 동이며 지혈대를 만들었다.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워할 것도 없다."


적막한 침묵이 이어졌다.

초저녁보다 바람은 잦아져 있었다.


화톳불에 볼을 벌겋게 달구고 있던 병방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너는 아비를 본 적이 없다 했지."


"예・・・・・・"


"그래・・・・・・ 생각해보면 너나 나나 허망하게 앞서간 사람들의 원연(怨緣)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원연이라니요? 제 아비와 병방께서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 아비를 만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누이였지."


"누이시라구요?"


"내 누이는 사도세자가 동궁에 있을 때 동궁처소에 있던 나인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세 살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외우고, 일곱 살에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뗀 신동이라 했지. 지금 우리가 익히고 있는 무예18반의 기초를 잡은 것도 그 사람이었지. 글씨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주던 신동이 아버지와 틀어지게 된 것은 철이 나면서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기대를 흠뻑 받던 어린 동궁이 정치를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면서 경종임금의 죽음에 대해 석연치 않은 풍문에 휩싸였던 아버지와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진짜로 그분이 당신의 형인 임금을 독살했는지 아니면 누대로 지켜온 사대부의 입지가 급격하게 흔들리게 된 노론이 무도한 반역을 성공시킨 것인지.


후사가 없는 젊은 임금의 강력한 이복세제의 등극이라・・・・・・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람들의 눈초리는 고울 수만은 없었겠지. 임금이라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그 자리는 언제든지 떨려나갈 수 있는 경각의 자리가 아니냐. 힘으로 잠시야 잡을 수 있겠지만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군주가 죽음을 편히 맞은 적은 고금에 없느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수군거림도 불안해했던 임금이 자신의 대를 이을 세자가 감히 자신을 의심하고 능멸한다 생각하니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느냐. 때 없이 아들을 의심하고 핍박하니 아들은 더욱 엇나가 신임사화를 대놓고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제까지는 믿었던 믿음직하고 순한 아들이 이제는 정적이 되어 칼을 겨누는 형국이 되었지. 정치란,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아비도 자식도, 어미도 아내도 없다. 그 물살에 휩쓸리면 내가 살려면 상대가 죽어야 한다.


태산 같던 아버지이자 부왕이신 분이 대놓고 의심하고 친모에게마저 버림을 받으니 본디 성정이 부드럽고 약하던 사람이 어찌 견뎠겠느냐. 끊임없이 모함 받고 위협을 당하다보니 그리된 것인가. 세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달포 전에 미친 세자가 있는 동궁으로 간다고 두렵다했던 누이가 온 몸이 장독에 절어 시신으로 돌아왔던 것이・・・・・・"


"사도세자가・・・・・・ 그리했단 것인가요?"


병방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역시 모르는 일이다. 미친 세자가 후궁을 때려죽이니 힘없는 나인인들 눈에 보였겠느냐. 그 서슬에 맞아죽었을지도 모르고 문숙의의 모함이 죽인 것인지도 모르고.

피바람이 난무하는 권력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이야 주인의 의지대로 잠시 붙잡혀있는 목숨들일 뿐인데."


병방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 아비와 나리의 누이가 무슨 상관이시라고?"


병방이 화톳불을 바라보던 눈길을 들어 나를 보았다.

흔들리는 불꽃이 병방의 눈동자에 담겨 떨리고 있었다.


"내 누이를 죽게 한 이가 네 아비였으니까."




* 그림 겸재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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