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하의 원행일이 다가왔다.
임금의 궁 밖 나들이를 '거둥'이나 '행행(幸行)'이라 하는데,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능행, 원(園. 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원행이라 한다.
역대 어느 임금보다 잦은 행행의 이유는 겉으로는 선침인 현륭원을 찾으시는 지극한 효성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행행 중 전하께 직접 다가와 백성들이 아뢰는 상언과 격쟁을 통해 당신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정치의 일환이었고 당신의 꿈인 화성 건설을 독려하며 외영부대인 장용영을 훈련하는 기회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사와 신하를 이끌고 오가면서 길을 닦고 다리를 세우고 공사를 세우니 자연히 산업이 일어나고 백성들의 일자리가 늘어났다. 또한 직접 백성들과 만나면서 지방수령의 나랏일을 살피게 되니 수령들이 백성과 임금을 두려워하여 몸가짐을 바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행하실 때마다 지나치는 고을의 백성들과 똑같은 음식으로 수라를 젓수셨다. 관리들은 두려워 공사(共事)를 행하니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도성까지 가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수시로 현지에서 별시가 치러지고 원행을 할 때마다 백성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과장마다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외영의 자부심이기도 하였으나 그만큼 커다란 부담이기도 하였다. 거리를 두지 않고 연로(輦路)의 전하 좌마 앞에까지 백성들이 달려들으니 그 때마다 호위 군사들이 아연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덤비는 자객이 언제 어디서 침노할지 모르는 일이다.
세손시절부터 동궁 침전에까지 자객이 수시로 난입을 하여 위기를 넘겼던 분이다. 전하께서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도 어체에 어떤 해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허니 원행이 예정되면 외영의 병사들은 모두 훈련에 더 한층 매진하였다. 게다가 전하의 호위도 호위려니와 갈고닦은 무술솜씨를 뽐내어 임금의 눈에 들 기회기도 하였으니.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훈련이 연일 계속되었다.
계절은 겨울로 깊어가고 있었으나 된서리가 걷히지 않은 새벽부터 산중을 오르내리고 말을 달렸다. 18반무예는 단단히 굳어가는 젊은 몸의 함성과 땀으로 완성되어갔다.
원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매복 습격을 대비한 야간훈련이었다.
단순히 간추린 옷에 피갑(皮鉀)을 입고 전통과 검을 메고 해가 떨어지자마자 산기슭에 위치하였다. 그믐이라 해가 지자마자 사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출발할 때 내 조는 분명히 넷이었다.
어느 결에 돌아서보니 선두에 선 내 뒤로 후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고립이다!
이각을 넘게 기다려도 후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가면서 살얼음이 끼는 계곡에 물소리도 잦아지는데 사방은 온통 먹물 같은 어둠, 손짓을 한 내 팔도 보이지 않는다.
매복임무니 신호탄을 쏘아 올릴 수도 없다.
바위틈에 몸을 가리고 귀를 기울이는데 문득 밤새 우는 소리가 창호지를 찢는 듯 날카롭게 지나갔다.
움직이지 않고 버티다보니 솜을 두른 옷이라 하나 매서운 밤바람에 몸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이 얼어 활을 쥔 손이 저절로 힘이 들어가 욱신거렸다.
기다릴 수는 없다.
더 이상 쳐지면 공격군인 우리 진영이 지고 만다.
아니 이러다 합류하지 못하게 되면 이 추위에 얼어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뭇가지가 바싹 마른 가을산이라 하여도 깊디깊은 산중, 앞이 보이지 않는 계곡이라 가늠이 되지 않는다.
눈앞을 가로막는 칡넝쿨을 단검으로 잘라 헤치며 길을 찾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넓적한 바위에 올랐다 하는 순간 나는 어둠에 헛디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거친 돌부리 사이 어디에 머리가 떨어졌는가.
불이 붙는 듯 뒤통수를 가격하는 통증에 숨이 막혀 비명조차 나오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목구멍 숨통이 터지지가 않으면서 그렇게 시야가 아득해져왔다.
가도 가도 캄캄한 어둠뿐인 길.
어디서 은가루처럼 쏟아지는 달빛이었던가, 아니 분분 날리는 꽃가루였던가.
아득한 의식너머로 그 옛날의 달밤이 떠올랐다.
내 목덜미로 다가오던 누이의 숨결.
떠나던 날 내 입술로 다가오던 그의 살 냄새・・・・・・
근적이의 얼굴도 다가왔다.
구름처럼 올린 머리를 풀어 내릴 때 내게 안기던 그의 달뜬 숨소리와 눈물들.
고마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너의 연모에 답하지 못한 것은 내 모자람이었다고, 부끄러움이었다고 그 작은 어깨를 안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아 그날들이 내게 있었던가.
아득한 의식 너머에서도 살을 에는 바람이 춥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춥고 배가 고팠다.
손끝 하나도 꼼짝할 수 없이 몸은 무겁고 지치는데 어쩌자고 이리 추운가.
우물 아래 깊이 잠긴 것 같은 내 귓가에 누군가 자꾸 나를 흔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아! 창아!! 김창! 이자식 정신차려!!"
* 그림 정조 원행을묘의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