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새로 잡고 어쩌고 하느라, 집에를 통 못 다녀가는 따님이 걱정되어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네요.
모처럼만에 찾아간 신도, 어머나 이게 누구야?
두목님 왠일이세요?
사업처를 아예 옮기셨어요?
속도 좋으신 목사님.
범상찮아보이는 손님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으시고 방을 빌려주시네요.
근데 미주씨, 지금 들고온 그 뒤숭숭한 담요는 누구 주려고 갖고 오신 겁니까?
아, 이불 털려고 나오셨다구요?
이 밤에요?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덮, 덮을라면 덮던가... 뭐 돈 더 달라고 안 할테니까.-
왜 이렇게 만나면 싸움부터 할까요 이 사람들 요즘?
그런데 맞대꾸를 하던 미주씨가 갑자기 입을 닫고 맙니다.
삐졌습니까? 왜요오...?
문을 쾅쾅 닫는다는 말이 마음을 상하게 한 걸까요?
자기도 모르게 무슨 실수를 했나 철렁해진 강재씨.
어쩐지 어색해져버렸습니다.
만나면 구박하고 빈정거리고... 그렇게도 못되게 굴더니 어째 우리 강재씨, 자꾸만 의사선생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이런 거였던가요.
강재씨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천 년 전에 태어난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하게 잔치를 준비합니다.
도무지 자신들을 위해선, 야무진 앞가림 따위는 할 줄도 모르는 이상한 사람들이, 색종이 별을 만들고 꼬마전구로 나무를 장식하면서 이런 장난을 이렇게 즐거워하며 놉니다.
얼결에 끼어들게 된 강재씨.
그런데 이상합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질까요?
마음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 조금씩 금이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 행복한 웃음소리에 자꾸 자신도 물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일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을 사람, 하강재.
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저 멀고 먼 나라의 가난한 아기의 탄생이 무엇이길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과 함께 웃는 저 사람의 얼굴을 보며 자꾸 마음이 풀려버렵니다.
이렇게 풀려버린 끈이 어딘가로 그만 흘러가버릴 것 같아 두려우면서도, 지금 강재씨의 눈에는 그 환한 웃음만 자꾸자꾸 커보일 뿐이었습니다.
놀이에 지친 아이들을 재우고 나오는 길.
두목님의 목소리가 문득 미주씨를 잡네요.
군밤... 맛있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군밤이었지요 그날밤은.
군밤을 받아안고 밤새 그걸 들여다보며 행복했던 사람도, 그 얼굴을 생각하며 또 뒤척이고 잠을 설쳤을 사람도, 그 밤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너무 잘 알거예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헤어지기가 어쩐지 허우룩해서 건넨 말이었는데, 아니 왠 밤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대요.
밤새도록 굽자구요?
아니 잠은 안자고 둘이 밤새 이걸 다 먹을 셈입니까 정말?
아 근데, 두목님 좀 똑바로 못하십니까?
그거 칼집 안 내서 펑펑 터지잖아요.
아 그참~! 연장은 두목님 전문이니까 좀 잘 해보세요~!!
가끔 빵빵거리고, 가끔 껌벅거리고, 그런다고 다 자동차는 아니지요.
자동차는 굴러가야지, 좀 서운하게 했다고 서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또 세연씨가 바래다준다고 나서면 어쩌려구요.
아니 뭘 또 어쩌겠다는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죠.
주인도 모르게 차를 끌고 와서 바퀴를 갈아버린 두목님, 영문을 몰라 쫓아와서는, 방방 뛰는 미주씨.
지금 전화 안 받는 거, 그거 작전이죠?
혹시 두목님, 진짜 선수?
어허.. 이거 좀 곤란한데요...
아 근데 좀 표정관리 좀 하세요.
뭐예요, 그거. 입 안다물어집니까?
아 그렇게 좋은 걸 어쩝니까요 글쎄.
이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던, 어떤 사람이건 아무 상관도 없었고 아픔도 아니었던 강재씨.
남들이 뭐라 부르던 대놓고 뭐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무시하면 그만이었고, 어차피 개처럼 굴러온 인생, 앞날을 생각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이 봐져요.
부끄럽고 싶지 않아져요.
이젠 월급봉투를 기다리며 그렇게 살고 싶어졌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두목님, 연장... 그녀가 툭툭 뱉는 말이, 욕이 되라고 하는 말이 아닌 줄은 알지만 가슴을 찌르는 못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져버렸습니다.
오늘까지는 나쁜 놈이니까, 그러니까 강재씨를 누가 뭐랄 수 없을 겁니다.
나쁜 놈이니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애인이 아닌 여자를 기다리며, 그 사람을 생각해버리고 말았다고 할 거예요.
누가 뭐래도, 자신의 마음이 요구하는 그 뜨겁고 못된 욕망을 이제 더는 물러서라고, 참자고 달래지 않을 거예요.
나쁜 놈이니까.
어차피 더 나빠질 수도 없는 그런 개자식이니까...
하지만 안되요...
강재씨 안되는 거예요...
당신의 마음에서 지금 무슨 소리가 아우성치더라도, 그건 당신의 말이라고 귀를 빌려주면 안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얼마나 착하고 바보같이 여린 사람인 줄을 알면서, 당신이 혼자 견뎌야 할 고통을 이 사람에게 넘겨줄 순 없는 거예요...
마음이라는 거, 가슴 한 쪽 어디에 그게 있는지도 몰랐던 그 마음이라는 거,
여기 있노라고, 머리를 흔들며 고함을 치는 그 소리를 당신은 들으면 안되요.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당신이, 더 가까이 가면 상처를 줄 뿐인 당신이...
언제 서로의 마음에 젖어들게 된 걸까요.
가슴이 전하는 말을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랐을때는 이미 마음은 저 먼저 저만큼 나가고 있었겠지요.
아니라고, 이건 정말 아닌거라고, 잘못 꾸는 꿈이라고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시작해버린 마음은 뒤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답니다.
어떡할까요.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도, 눈을 감아도 이미 먼저 눈 앞에 다가와 고개를 떨구 있는 그 사람의 그림자를 이젠 더는 아니라 할 수가 없답니다.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할까요.
착한 미주씨, 냉정했던 강재씨는 이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어떻게 지켜낼 수가 있을까요.
시리고 추운 밤입니다.
마음을 달래려고 맥주캔을 들고 옥상에 올랐던 미주씨는 먼저 와 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니어야 하는데... 이렇게 자꾸 부딪혀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안으로 들어가는 걸음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봅니다.
들고있던 전화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깨어진 것은 액정만이 아닙니다.
서로가 말은 하지 않지만,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추운 밤이었습니다.
두사람의 마음에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지 못할 말들이 많아지면서 자꾸 숨을 곳을 찾게 됩니다.
왜 숨어야 할까요.
왜 피해야 할까요.
그러게요. 이들이 무얼 어쨌다구요.
아직 무엇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