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엔 눈이 많이도 왔다.
좀체로 눈 보기가 드믄 고장이어서 서울의 외갓댁에 갔다가 처음 눈을 본 누구네 어린 조카는 하늘에서 풀풀 날리는 눈발을 보며 경기를 하려 하더라는 우스갯소리가 돌던 곳이었다.
그 반가운 눈을 보고 온 동네가 북적이고 온천장 골목마다 어깨를 맞댄 연인들로 넘쳤지만 그 번화한 동네 한복판에 있는 자애병원만은 교교하기만 했다.
술 취하고 싸우다 터지고 째진 취객들로 날마다 시끄럽고 그 보호자들로 더 정신 사나운 응급실도 그 날만은 감기 환자 한 명 없이 조용히 지나갔고 병동의 간호사들도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조용 오갔다.
장기 입원하여 저간 동네 분위기를 빤히 꿰는 환자들도 어찌 큰소리가 나 김경일 씨의 심사를 돋굴까 걱정되어선지 일찌감치 불들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치 없는 초보 입원 환자가 주사 놓은 데가 부풀었다고 볼멘 소리를 하다 심란하게 어정거리던 경비 박씨에게 한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쑥 넣었다.
색시의 오빠되는 이가 며칠 후 찾아와서 옷가지들이며를 챙겨갔다.
김경일 씨는 그를 만나지도 않았고 짐을 챙겨 나갈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내 붙어 있던 방사선과에서 소주 세 병을 비우고 그 양을 꺼내어 다시 확인을 하고 다음날 하루 종일을 빈 병실에서 처박혀 잤다.
그리고는 김경일 씨는 아예 '개경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원장도 누구도 보이는 게 없었다. 사는 데 맥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되는대로 먹고 몸이 가는 데서 잠이 들었다. 색시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에 관련된 어떤 말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넘기던 곡기도 아예 끊어버리고 술로 배를 채웠다.
얼굴은 까맣게 타 들어가 평소에도 범상치 않은 용모를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홀쭉 말라붙은 체구에 배만 통통 불어 옆 그림자로 보면 넘어졌다가는 혼자 일어서기가 쉽지 않게 보였다.
황달이 심해 꾸먹 패인 눈자위는 누렇게 물들었고 남들의 눈에 뜨지 않게 감춘다고 감춘 손끝은 자주 떨렸다.
이틀 걸러 한 번은 원무과를 뒤집어 놓았고 그를 모르는 까탈스런 환자가 거슬리는 소리를 하기라도 하면 맨발로 달려나가 일을 해결했다.
물론 그 환자는 다음날 외과 병동에서 붕대를 갈아붙이고 있던지 앞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고 있던지 둘 중의 하나였다.
김경일 씨가 지하방으로 가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병원 앰뷸런스 기사 이씨와 아미동 대학병원에 환자를 실어다 주고 오던 길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표정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김경일 씨가 갑자기 "수더업, 수덥!"을 외쳤다.
놀란 이씨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앞으로 한 번 몰렸다 제 자리에 돌아오기도 전에 차 문을 열고 도로로 뛰어내린 김경일 씨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길가에 차를 세우고 따라 쫒아간 이 기사는 그러나 김경일 씨를 금세 잃어버렸다.
원래 성질나면 앞 뒤 없이 날뛰며 단련된 몸뚱이라 제 혼도 못 따라가게 내빼버리니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고 종적을 찾다 포기하고 이 기사는 혼자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환자나 넘겨주고 오랬더니 덤으로 주고 왔냐고 원무과장으로부터 욕깨나 얻어들은 이 기사가 부은 볼통으로 퇴근하고도 한밤중이 되어서야 김경일 씨는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