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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30.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5/2003 11:21 am공개조회수 0 1


길고 지리한 밤이었다.
먹물을 풀어놓은 듯, 캄캄한 어둠 속에서 줄 지어선 나무들이 어깨를 떨었다.
연신 피워댄 담배로 목구멍이 따가왔다.
나는 마른 기침을 했다. 물밑처럼 고요하던 어둠이 잠깐 출렁였다.

창의 음성은 차츰 낮아져서,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나와, 영이의.....우리의 집이었어요....

그랬겠지...그랬겠지....
그대들은 지상에서 갖지 못한 당신들의 방을, 아무도 없는 그 먼나라에 오롯이 만들었겠지.
매운 바람이 불던 이른 봄의 쌍계사가 떠올랐다.
물방울 처럼 튀어오르던 그녀의 미소. 보라색 스웨터 위로 뻗어올라갔던 눈부신 목덜미.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한없이 부드럽고 낮던 미소. 깊게 패이던 볼우물.

처음 피어날때, 불안하고 어리둥절하던 마음들은 급격하게 자랐을테고, 뻗었을테고, 그리고는 서로의 마음에 뿌리를 내려버린 것이겠지. 이제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한 사내로, 한 계집으로 그렇게 서 버린 것이겠지.

영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볼우물이 패이던 창의 얼굴이,
조검사의 이름이 나오면서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목소리가 갈라지기까지 했다.

석연찮은 아버지의 불명예 퇴직에, 어떤 손길이 닿았는지를 나는 희미하게 짐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동생을 곱게 길러준 이들에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떤 댓가도 없이, 아니 그 난리통에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동생을 거두고 안아준 이들에게 그런 원한을 갖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창이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조검사를 얼마나 싫어하고 적개심을 갖고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조검사가 다시 영이 앞에 나타났다면....창이 받을 상처와 고통을 짐작하기에 영이 두려워한 거겠지.

그들이 한가지로 묶여 살수 있을까.
부모가 엄연히 다르고 핏줄이 다르고, 서로를 향한 마음이 그토록이나 지극하지만 그들을 가시버시로 쉽게 받아들여줄까.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오빠가 그것을 인정해줄까.
그들이 세상에 나오려 하지 않았던 것을 나는 이해가 되었다. 같이 살면서 다져온 세월은 이제 족쇄가 되었을 것이다.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그들의 묶임을 거부하고 상처를 줄 것이다.

"지루하고 덧없는 말이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착잡하게 말이 없는 내게 창이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요....낯선 사람이라 그분께 제가 주제넘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가 이선생님께 거듭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는 일어서서 목례를 했다. 나도 일어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허전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를 알고 처음으로 본 모습이었다.

사랑이, 어느 경계까지 제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사랑이 가능하고 어디서부터 부정스러운 걸까.

그래서 그들이 불행했던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이를 위해서 자신이 가졌던 세상도 베어버리고, 꿈도 접고, 산으로 걸어간 창과, 창의 그늘 아래서만 비로소 행복하고 안온했을 영이 비록 불완전하고 영원하지는 못할 보금자리지만 그에게서 쉴 수 있었으니 그들의 지금은 누구도 부러워 하지 않을 행복이었을 것이다.

나는 문득 ....웃고 말았다.
그래 원준아. 여기까지다. 나의 몫은 여기까지다.
그들의 사랑을 들어주고 보아주고 그리고 염원해야하는 것이 나의 몫이고 자리다.
나는 인연이 허락하는대로 그리할 것이다. 그럴 것이었다.

길고 지리한 밤이었다.
어둠을 나누어서 제 몫으로 두고 단단히 잠든 나무들이, 나는 참으로 부러웠다.

밤은 어쩌자고 끝도없이 길어질 모양이었다.

뒤늦게 터덜터덜 영의 병실로 다시 돌아갔을때, 영은 깨어 있었다.
창이 가방에서 꺼낸 화첩을 펴들자 이미 익숙한 일인 듯 영은 베게를 등에 기대고 고쳐 앉았다.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

창은 연필로 스케치를 시작하고, 비스듬히 앉은 영은 상기된 채로 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빠르게 내려가는 연필자국이 부드러운 영의 얼굴선을 잡았고, 마늘쪽처럼 솟은 콧마루와 눈을 잡았고, 풍성한 머릿단을 불러왔다.
온통 창을 뿌옇게 만드는 가습기의 낮은 소음이, 사각사각 연필소리와 어울려 병실을 채울 뿐이었다.

창이 그려가는 영의 얼굴을 망연히 들여다보다, 나는 병실을 나왔다.

밤은 어느새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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