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지리하게 흘러갔다.
창이 마침내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퇴직을 한 후였다.
뇌물을 먹었다는 투서가 들어왔다고 했다.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증거도 증인도 나타났다.
누구에게도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느냐 주위에선 안타까워했지만 공직사회기강이 무너진다는 한탄이 날마다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사랑이 변했던가.
글쎄.....사랑이 더 자랐는지는 모르지만 창이 변하지는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려온 그림을 서랍에서 꺼내서 남몰래 들여다보며 살았다.
통통하던 젖살이 빠지고, 목선이 길어지는 그림을 들여다 보면서 창은 가슴이 저미는 외로움을 느꼈다.
어디에 있을까 이 아이.
가슴에 기대서 울던 그 아이, 손을 뻗으면 그대로 그 부드러운 어깨가 잡힐 것 같은데.
꿈에선 언제나 영은 맨발로 빗속에 서 있었고 창은 돌아서서 영을 보지 못했다.
그 꿈의 마지막은 늘, 소리없이 다가오던 그 부드럽고 따뜻하던 영의 눈물젖은 입술로 끝이 났다.
황망한 꿈 중에도 끌어안는 영의 어깨가 슬펐고, 파고들수록 더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이 안타까웠다.
무슨 냄새던가, 어느 꽃에서 피는 향기길래 이토록 그의 가슴을 물들였던가. 밤새도록 발없는 꿈이 그의 베갯가를 오갔고 그의 젊은 잠은 깊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었다.
영이 여고생이 된 해였다.
영이의 입학기념으로 부모님은 광주에 내려갔다.
새 옷이라도 사 주고 얼굴이나 보고 온다고 했다.
그날 밤, 창은 전화를 받고 광주로 달려갔다.
교통사고였다. 삼중추돌.
저녁을 먹고 돌아나오던 아버지의 차는, 골목길에 뛰어든 트럭에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옆에 있던 영이는 혼수상태였다.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온몸의 뼈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버렸고, 장기는 온전한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상했다. 가장 참혹한 것은 폐와 췌장이었다.
그날따라 몸이 불편했던 어머니가 눈을 붙인다고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나마 치명적인 화는 면했다.
아버지를 선산에 모시고 돌아와 창은 학교를 접어버렸다.
생사를 넘나드는 지리한 싸움이었다.
영은 쉽게 깨어나지 못했고, 그녀의 병상을 지키며 창도 시나브로 시들었다.
보다못한 어머니가 만류했지만 창은 막무가내였다.
어머니로부터 나중에 사고 경위를 들었다.
범죄였다.
조검사가 수사하던 조직폭력의 일파가 검사를 협박하다 그의 누이를 치어버린다는 것이 그날 아버지의 차였다.
창은 조검사를 만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깨어나도 그에게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말만 전했다.
한달을 넘겨서 영이 비로소 의식을 회복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을 가진 채였다.
아마는 살면서 내내 살얼음판을 걷듯 해야할테고, 독한 약을 계속 먹어야 하고, 그리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 했다.
창은....그녀가 다시 돌아와준 것만, 살아준 것만 감사해서 오래 울었다.
엎드린 그의 얼굴을 파리해진 그녀의 손이 오래 쓰다듬었다.
영은 다시 창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집으로는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 있는 사이, 어머니는 정식으로 친척들에게 영을 가족의 일원으로 올리려 했지만 뜻밖에도 반감은 완강했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던 어머니는 요양을 겸해 영과 창을 지리산 암자로 보냈다.
그들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