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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7.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3/2003 02:38 pm공개조회수 0 4




다음날이었다.

간밤 술에서 덜 깬 선배들을 놔두고 1.2년차들과 몇이서 쌍계사로 올라갔다. 여기까지 왔으니 지척에 두고 화엄, 쌍계를 못 들러보면 말이 되냐고 내가 한 소리지만 사실은 어제 본 남녀가 떠올라서였다.
여행객 차림도 아니었고,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절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내가 왜 그들을 궁금해 했던가.나도 모르겠다. 그저 티없이 웃던 젊은 여자의 맑음과, 따뜻하고도 서늘하던 청년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나도 모르게 발을 끈 것이었으리라.

대웅전과 각황전을 둘러보는 동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명부전까지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하긴 여간 큰 절이 아니었으니 아침 조반녘에 절 식구들 찾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고 관광객들이라면 더더욱 아닐 터였다. 떠났나?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좀 쓸쓸하고 아쉬워졌다.

낡은 전각을 돌아나오는데 승복을 입은 노인이 바구니를 끼고 지나가고 있었다. 굽은 허리가 땅에 닿을 듯했지만 어쩐지 꼿꼿한 기품 같은게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할머니, 여기 혹시 젊은 분 둘이 없으십니까?"
구부정한 허리를 잠깐 펴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노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기....한 스무살 쯤 되는 여자분하고, 좀 더 되는 총각인데요"
"누구...? 영이네? 영이네 말씀하시는 구랴...왜 아는 사이요?"
영이, 여자 이름이 영이였구나.

"왜 찾소?"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찾을까. 왜 그들이 궁금했을까. 나도 모르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고 헛기침을 했다.

"어제 언뜻 보았는데 제 후배를 닮아서요. 일행하고 같이 오기로 했는데 못 만났지 뭡니까?"
때마침 탑쪽으로 우르르 나오던 동료들을 보고 나도 몰래 나온 말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좀 풀어졌다.

" 아닐게요. 어제 젊은이들이 절에 들어오진 않았다오. 여기 있는 사람이야 스님의 조카들이니 총각 일행같진 않구려"
" 아..예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명부전 뜨락을 벗어났다.

스님의 조카들....절 식구들이구나. 조카들이면..남맨가? 그런데 남매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다시 볼 일은 없었다. 서둘러 아침결에 쌍계사까지 한달음에 둘러보고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
이따금 일찍 피었다가 지는 매화꽃들이 차창으로 날아들었다. 봄길은 아직이었는데 저렇게 먼저 지는 꽃들도 있었다.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난 것은 작년 여름 농촌 봉사활동에서였다.

태풍이 지리산 자락을 마구 휩쓸고 지나가고, 고립된 마을에서 환자가 속출해도 의료진이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병원에서 봉사활동 팀을 꾸렸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일에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지리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망설일 틈도 없이 서둘러 신청을 하고 말았다. 누가 내 자리를 뺏기라도 할 것처럼....

왜 그랬을까. 나는 왜 다시 지리산, 아니 그 절로 다시 돌아가보고픈 것이었을까. 무엇이 나를 끌었던가...무엇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봉사활동 기간 내내 지리한 장마였다. 폐교를 정리해서 대충 진료실을 만들고 요행이 온전한 마을 사람의 집에 행장을 풀었다.
계곡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간 태풍은 그 전 봄의 아름다운 꽃길을 형체도 없이 뭉개 버렸고 작은 물길이 흘러가던 시냇가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함부로 뒤엉켜 물길이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사실은 약이나 치료보다도 지붕을 새로 얹고 벽돌을 올릴 자원봉사자가 더 필요해 보였다. 팔 다리가 다치고 아픈 것보다도 집을 잃고 논 밭이 떠내려간 상처가 더 깊었다.

사흘을 예정했던 일정은 이틀이 더 지났다. 떠나기 전날 밤, 어느정도 정리가 된 마을에서 우리를 위해 저녁을 마련해 주었다. 이재민들이 해주는 밥을 먹기는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지만 길이 끊긴 마을에 처음 찾아준 외지인들이라 더 고마왔던 모양이었다.

눅눅한 공기를 없앤다고 후배들이 불쏘시기를 찾는동안 나는 마을 뒷편으로 난 산을 올라갔다. 마을을 안고 있는 산이긴 했어도 지리산 품자락이라 서늘하고 깊었다.

온전한 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먼 옛적부터, 한 사람, 두 사람이 만들고 뒤를 이어 걸어오면서 만들었을 자연스런 산길은 한번의 태풍에 사정없이 비틀렸고, 지반을 온통 헤집어 놓은 것처럼 뿌리를 드러낸 집채만한 바위가 소나무 허리에 얹혀 있었고, 어린 청솔가지들은 사정없이 거꾸로 처박혀 고개를 묻는 모습이었다.

빗물에 미끄러운 나무가지들을 잡고 겨우 겨우 산길을 되짚어 내려오던...내 눈에 무엇인가가 화다닥 들어왔다.....그녀였다. 그녀였다....
삼십여 미터 앞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 낡은 푸른 셔츠를 입어서 그때보다는 좀 어려보였지만 여전히 관목가지처럼 싱싱한 흰 목을 드러내고 긴 머리채가 살짝 비에 젖은 그녀가 틀림없었다.

내 가슴은 숨 쉴틈도 없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통스럽게 발목을 쥐고 있는 것이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함부로 돌덩이들이 뒤엉킨 산길을 달려 내려갔다. 발 밑에서 젖은 흙이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내가 그녀 앞에 막 다가갔을 때였다.

"누구야~!"

귓전을 쨍 하니 울리는 목소리,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어깨를 난타하는 나뭇가지. 나는 피할 틈도 없이 호되게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풀숲이 우거진 곳에 처박혀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앞엔 얼굴이 일그러진 그 사내가 몽둥이를 고쳐 잡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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