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阿)'는 원래 가파른 언덕을 뜻하는 말이었다. 언덕 부(? )가 의미요소로 쓰인 것으로,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자면 몸을 최대한 낮추고 지면에 붙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부(附)' 역시 언덕 부(? )가 의미요소로서 본디 '나지막한 흙산'이라는 뜻이었는데, '기대다'. '빌붙다'는 뜻으로 확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아부(阿附)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한다.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알량거리며 붙좇고, 자신에게 유리한 뭔가를 얻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아부와 비슷한 말로 아첨(阿諂)이 있는데, 이 말에 말씀 언(言)이 붙어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꼬드기는 수단으로서 당연히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흐흠. 언덕부에 이런 뜻이 담겨 아부가 된다는 말.. 재밌다.
p.248-249
공동체 생활에서 용기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이 용기를 발휘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는 사회는 건강하다. 이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고 '관계의 의미'를 획득하게 한다. 이렇게 용기는 '타자를 위한 행위의 덕'이 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道)이 된다.
p.265
겸허는 원래 위치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 평소의 자기를 넘어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떤 일에 총명하게 대처하거나 정의롭게 행동하거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훌륭한 평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이런 행위와 평판은 그 어떤 경우도 '편안한 '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위나 처세가 일시적으로 뛰어날 수는 있어도 지속적이기 무척 어렵다. 일상적으로 지속될 경우 엄청난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기 때문이다.
p.272
체념의 체(諦)는 '살필 체' 또는 '밝힐 체'이다. '진리 체' 또는 '뜻 체'이기도 하다. 체념하려면 자신의 능력과 처지를 잘 살피고, 일어난 사건과 하고 있는 일의 이유를 밝히며, 참된 것을 성찰하고,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체념은 '도리를 깨닫는 것'을 전제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에 따르기는 하지만, 운명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깨닫고 그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체념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황을 정신 차려서 살펴보아야 (체관 諦觀)하고, 운명의 소리를 주의하여 똑똑히 들어야 (체청 諦聽)한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서 그저 운명에 내맡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형성어 '체(諦)'의 '임금 제(帝)'가 단어의 음(音)을 결정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글자 전체에 인간 행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뜻을 부여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체념은 그와 자주 혼동되고 혼용되는 포기(抛棄)와 다르다. 포기는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포기는 세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거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 하던 일이 힘들어 포기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서 포기할 수도 있다. 또한 경쟁 상대가 있어서 서로 맞서고 있을 때, 상대가 강하여 포기할 수도 있고 외압에 의해 포기할 수도 있다. 이때 포기는 항복(降服)과 유사한 의미다.
포기는 상대의 힘을 아는 것인 반면, 체념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하지만, 알아서 체념한다. 포기는 힘에 꺾이는 것이지만, 체념은 힘을 거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쉽게 포기한다'는 말은 맞아도 '쉽게 체념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는 일에 용이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거두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p.273-275
김용석 <푸른숲>
그러므로 아부(阿附)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그 특성으로 한다.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알량거리며 붙좇고, 자신에게 유리한 뭔가를 얻어내는 행위인 것이다. 아부와 비슷한 말로 아첨(阿諂)이 있는데, 이 말에 말씀 언(言)이 붙어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꼬드기는 수단으로서 당연히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흐흠. 언덕부에 이런 뜻이 담겨 아부가 된다는 말.. 재밌다.
p.248-249
공동체 생활에서 용기는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이 용기를 발휘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는 사회는 건강하다. 이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고 '관계의 의미'를 획득하게 한다. 이렇게 용기는 '타자를 위한 행위의 덕'이 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道)이 된다.
p.265
겸허는 원래 위치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 평소의 자기를 넘어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떤 일에 총명하게 대처하거나 정의롭게 행동하거나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훌륭한 평판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이런 행위와 평판은 그 어떤 경우도 '편안한 ' 상태의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행위나 처세가 일시적으로 뛰어날 수는 있어도 지속적이기 무척 어렵다. 일상적으로 지속될 경우 엄청난 에너지의 소모가 따르기 때문이다.
p.272
체념의 체(諦)는 '살필 체' 또는 '밝힐 체'이다. '진리 체' 또는 '뜻 체'이기도 하다. 체념하려면 자신의 능력과 처지를 잘 살피고, 일어난 사건과 하고 있는 일의 이유를 밝히며, 참된 것을 성찰하고, 그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숙고해야 한다. 그래서 체념은 '도리를 깨닫는 것'을 전제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에 따르기는 하지만, 운명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깨닫고 그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체념하기 위해서는 모든 정황을 정신 차려서 살펴보아야 (체관 諦觀)하고, 운명의 소리를 주의하여 똑똑히 들어야 (체청 諦聽)한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서 그저 운명에 내맡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형성어 '체(諦)'의 '임금 제(帝)'가 단어의 음(音)을 결정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글자 전체에 인간 행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뜻을 부여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체념은 그와 자주 혼동되고 혼용되는 포기(抛棄)와 다르다. 포기는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포기는 세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거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 하던 일이 힘들어 포기할 수도 있고, 하기 싫어서 포기할 수도 있다. 또한 경쟁 상대가 있어서 서로 맞서고 있을 때, 상대가 강하여 포기할 수도 있고 외압에 의해 포기할 수도 있다. 이때 포기는 항복(降服)과 유사한 의미다.
포기는 상대의 힘을 아는 것인 반면, 체념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하지만, 알아서 체념한다. 포기는 힘에 꺾이는 것이지만, 체념은 힘을 거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쉽게 포기한다'는 말은 맞아도 '쉽게 체념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는 일에 용이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거두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p.273-275
김용석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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